정치가 지닌 분노[임용한의 전쟁史]〈143〉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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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분이 약혼녀를 데리고 시골집에 인사를 갔다. 할아버지는 손자 며느릿감을 보고 아주 흡족해하셨다. 그러다가 성(姓)과 집안을 물어보더니 “이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호통을 쳤다. 여성분 집안이 조선시대 당쟁의 라이벌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당쟁도 전쟁이다. 아니, 정치판도 전쟁이다. 총칼로 싸우지는 않아도 결국에는 피를 부르더라는 점도 닮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피와 살육, 직접적인 폭력과 잔혹성이란 점에서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 말의 본의는 ‘정쟁(政爭)이 전쟁으로 발전한다’가 아니고, 국가 간의 갈등을 가능하면 무력을 동원하지 말고, 전쟁보다는 정치로 풀자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토록 참혹한 전쟁이 화해가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일부였던 페가수스 작전을 지휘했던 존 하워드 소령은 전후에 건너편에 있던 독일군 지휘관 한스 루크 대령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반면에 정쟁은 화해가 안 된다.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악수해도 돌아서면 칼을 꽂는다. 더 황당한 건, 정치인들보다 화해하기 힘든 사람이 그들의 선동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증오하고, 하지도 않은 일에 평생토록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다.

선동가들은 세상의 문제를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한다. 이것만 해결하면 내 삶이 바뀐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치가에게 기대를 걸고 과도하게 흥분한다. 전쟁도 비슷하게 선동을 한다. 그러나 전쟁터를 다녀온 사람들, 적을 사살하고 폭사시킨 사람들은 이를 깨닫고 화해를 한다. 일상의 전쟁은 이게 안 된다. 그래서 정치의 분노는 끈질기다. 정치가 이 대립을 푸느냐, 이 분노에 기생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격과 운명이 달라진다. 전쟁의 승리와 패배가 국운을 바꾸는 것처럼.

임용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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