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성 철강 노동자가 만난 ‘두 개의 미국’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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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오현아 옮김/432쪽·1만6800원·마음산책

좌우로 갈린 미국의 상징이 돼 버린 러스트벨트. 하지만 제철소 안 용광로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 빛을 발한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의 저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죽음과 부상에 언제나 노출된 위험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이들 틈에서 ‘진짜 삶’을 배운다. 동아일보DB
좌우로 갈린 미국의 상징이 돼 버린 러스트벨트. 하지만 제철소 안 용광로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 빛을 발한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의 저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죽음과 부상에 언제나 노출된 위험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이들 틈에서 ‘진짜 삶’을 배운다. 동아일보DB
클리블랜드의 허허벌판과 제철소가 내뿜는 거대한 연기를 보며 자란 소녀. 을씨년스러운 공업지대를 보며 성장했지만 설마 그곳에서 자신의 삶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꿈꾸는 대로 성취할 수 있다는 ‘미국적 열정’을 소녀도 믿었다. 하지만 영문학 교수란 꿈이 좌절된 후 돌아오게 된 건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고향 클리블랜드의 제철소다. 철강소의 유틸리티 노동자 6691번으로 입사한 그녀에게 나이 지긋한 직원이 말한다.

“조심해. 까딱하다가는 기계가 자네를 집어 삼킬지도 몰라.”

제철소에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높은 화통과 크레인, 반짝이는 것이라곤 철강밖에 없는 곳. 잠시 방심하는 사이 컨베이어벨트 강재 사이에 사람이 깔려 죽는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일터에 첫발을 들인 이들에게 유효한 경고이기도 하다. 안정적 수입, 잘 갖춰진 복지혜택. 세계적 불황과 취업난 속에서 현실과 타협해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이곳에, 어린 시절 꿈꿨던 이상적이고 고상한 일상 같은 건 없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삼켜지기 십상이다. 그것이 기계이든, 조직이든, 일 자체이든 말이다.

이 책은 4년 전 워싱턴 정가의 이단아였던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표밭이자 올해 치러진 미국 대선의 격전지였던 러스트벨트에서 ‘어쩌다 철강노동자’가 된 한 밀레니얼 여성의 기록이다.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를 뜻하는 러스트벨트는 1970년대까지 미국 제조업 중흥을 이끌던 곳. 하지만 이제는 산업 공동화(空洞化)로 높은 실업률, 빈곤에 시달리는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이 가득한 곳으로 대변된다. “하와이는 커피, 버지니아는 땅콩이 나는데 클리블랜드에서 뭐가 나느냐”는 질문에 이곳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대답한다. “실패.”

러스트벨트는 제조업 활황기 미국의 옛 영광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현재 미국 사회가 이르게 된 다양한 문제가 뒤엉킨 곳이다. 이 때문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곳이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페미니스트, 영문학 교수를 꿈꿨던 저자가 철강소에 입사해 겪게 되는 모든 과정은 흥미로운 개인서사를 넘어 현대 미국 사회가 마주한 문제를 미시적으로 증언한다. 페미니즘, 총기 등의 주제를 놓고 가족, 동료와 부딪치는 진보주의자지만 한편으론 자신들을 ‘시골뜨기’ ‘블루칼라’로 분류해버리는 동부의 ‘화이트칼라’ 엘리트에게 편견과 반감을 갖지 않기 힘든 처지다.

하지만 저자 자신조차 벗어나지 못했던 러스트벨트 노동자에 대한 통념은 늘 산재가 도사린 위험한 현장에서의 동료애, 정직한 노동과 공정 속에 녹아들며 조금씩 와해돼간다. 뿌리 깊은 개인주의, 성과주의 문화 속에서 자라온 젊은 여성이 노동의 진짜 가치를 발견하는 성장 스토리가 아름답고 흡인력 있는 문체로 그려졌다. “제대로 바라보면 불꽃은 숨을 멎게 한다. 그 불빛 속에서 제철소는 거의 신성해 보인다”는 마지막 문장은 분열 속 미국이 그리워하는 어떤 이상(理想)처럼 읽히기도 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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