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만든 나라 독자라면 ‘서사의 탐구’ 어렵지 않겠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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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최고 권위 전미도서상 한국계 첫 수상… ‘신뢰연습’ 국내 출간한 수전 최
연극학교 배경 서사의 신뢰 다뤄… 반전 거듭하며 강한 흡인력 보여
하성란-이태준 작품 즐겨 읽어 “할아버지 최재서 다룬 소설 계획”

수전 최는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삶이 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경계인적 정체성은) 사물을 보는 시각, 집필 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Heather Weston
수전 최는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삶이 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경계인적 정체성은) 사물을 보는 시각, 집필 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Heather Weston
지난해 한국계 작가 최초로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소설가 수전 최(51)는 1998년 등단 이후 줄곧 미국 주류 문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전미도서상 수상작이자 최근 국내에 번역된 장편 ‘신뢰연습’은 연극학교를 배경으로 성적(性的) 합의, 서사의 신뢰 문제를 해체적으로 다룬다. “완전히 넋을 빼놓는 이야기”(전미도서상 심사평) “성적 합의에 대해 고찰한 최고의 작품”(뉴욕타임스) 등의 호평을 받았다.

예술고등학교 연극과 학생 두 명이 사랑에 빠진다. 이 사실이 친구들과 카리스마 있는 연기 교사인 킹슬리 선생에게 알려진다. 선생이 두 사람의 사랑에 개입한 후 충격적인 일들이 휘몰아치듯 벌어진다. 반전을 거듭하는 비정형적 이야기, 인물들 간의 진실 게임뿐만 아니라 화자와 독자 간 신뢰 문제까지 제기하는 이 작품은 눈을 떼기 힘든 흡인력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는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뻔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지만 이 말은 반드시 해야만 할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기생충’ 같은 영화를 만드는 나라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을 준비는 그 이상이 돼 있다고 본다. 작품이 다루는 ‘서사의 탐구’를 한국 독자들이라면 그리 놀랍게 여기지도 않을 것 같다.”

그는 “믿기 힘든 반전과 눈부신 서사로 짜인 ‘기생충’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봉준호 감독이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설의 잠재력을 완전히 깨닫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봤다”고 경의를 표했다.

이 작품은 학교 내에서 위계, 권위를 악용한 성적 합의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최 씨는 “소설 대부분은 2017년 말 미투 운동 발생 전에 이미 탈고한 상태였지만 그런 일이 이전부터 있었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며 “오랫동안 학교 내에서의 성적 불법 행위에 대한 뉴스를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고 교사와 학생 간 불균형 등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소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사 권력과 화자의 진실성 문제로 나아간다. 1인칭, 3인칭이 한 화자에 의해 동시에 기술되는 실험도 펼쳐진다. 그는 “내게 소설의 큰 주제는 항상 등장인물과 그들의 욕망에서 딸려 나오는 것”이라며 “처음에는 단순히 연극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그들의 문제가 ‘동의’와 ‘서사의 주체(narrative control)’ 문제인 것이 곧 드러났다”고 말했다. ‘무엇(누구)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독서 후의 강렬한 의문은 역설적으로 작가가 얼마나 이 서사를 장악했는지 반증해준다.

그는 한국 영화와 소설의 팬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내 책꽂이에 있는 책 중 몇 권을 소개하자면 ‘이별의 말들, 한국여성 작가 단편소설’ 같은 문학선집이 여러 권이다. 하성란 작가의 단편집 ‘곰팡이꽃’, 이태준의 단편선집 ‘먼지 외 다른 이야기들’도 즐겨 읽는,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책들이다.”

그는 “한국 독자들은 비전통적 이야기에 열렬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며 “그런 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쓴 내 책도 좋아해주지 않을까 무척 기대된다”고 말했다.

예일대와 코넬대 대학원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는 문학평론가 최재서(1908∼1964)의 손녀이자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최창 교수의 딸이다. 6·25전쟁 참전 후 미국으로 망명한 아버지의 삶을 그린 ‘외국인 학생’으로 데뷔한 만큼, 한국적 뿌리와 한국계라는 정체성은 작가로서의 출발뿐만 아니라 작품 세계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에 늘 끌린다. 미국에서 우리 위치는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인종 문제가 심각한 이 나라에서 우리가 어느 위치쯤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쓰며 산다. 권력을 잡거나 백인 엘리트 위주의 최고 교육기관에 입학도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질문은 그대로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맞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 혹은 아닌지부터 말이다.”

그는 친일 논란이 있는 할아버지인 최재서에 관한 소설을 집필할 계획임을 몇 차례 밝히기도 했다. 그 계획이 여전히 유효한지 묻는 질문에 “물론”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다룰지 알아내는 것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첫 장편을 쓸 때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6·25전쟁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지만 결국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전쟁 직전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일제 강점기는 어땠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20세기 초 역사를 더 알기 전까지 현재의 한국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지만 “재벌을 포함한 한국의 많은 면을 매우 흥미롭게 여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신뢰연습#전미도서상#수전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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