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읽는 법]너그러운 허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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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억관 옮김/440쪽·1만4800원·민음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몰입할수록 불안해진다. 또 갑자기 ‘길이 140cm의 땅콩 모양 공기번데기’(1Q84)나, ‘키 60cm의 흰 옷 걸친 인간’(기사단장 죽이기)이 등장할까봐서다. 그런 요소가 비현실적이어서는 아니다. 꾸역꾸역 이해하면서 따라왔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그 지점부터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여름부터 7개월 동안 날마다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다자키 쓰쿠루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는 그런 불안감은 없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게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손 닿는 곳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면 거침없이 열어젖혔을 거다.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일상의 연속으로.”

쓰쿠루는 고등학교 때 각각 적, 청, 흑, 백을 이름자로 가진 친구 4명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행복하게 어울렸다. 색채가 없는 이름처럼 자신에게 개성이 없다고 여긴 쓰쿠루는 선명한 특색을 지닌 친구들을 깊이 사랑했다. 그리고 대학교 여름방학 어느 날, 4명의 대표로 전화를 걸어온 친구로부터 절교 통보를 받는다.

“이제 누구의 집에도 전화를 걸지 마. 이유는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어. 너 스스로 돌이켜보면 알지 않을까? 4명 모두의 뜻이야. 다들 유감스럽게 생각해. 무슨 일인지는, 자신에게 물어봐.”

그날부터 몽유병자처럼 반년여를 보낸 쓰쿠루는 몸무게가 7kg 줄어 체형이 바뀐 자신의 몸을 문득 알아챈 뒤 차분하게 다시 정돈된 생활을 시작한다. ‘알아낼 수 없는 건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납득한 채, 전과 다른 듯 비슷한 삶을 16년 넘게 꾸려간다.

하루키는 에세이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원래는 쓰쿠루가 친구들로부터 부정당한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의 단편을 쓰려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인 쓰쿠루의 연인 사라가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꼭 봐야 할 것을 봐야 해’라고 말하는 바람에 친구들을 다시 등장시켜 장편을 썼다는 거다. 하루키는 “나는 그때 사라의 말을 그대로 받아썼을 뿐”이라고 했다.

일면 사라는 공기번데기나 기사단장만큼 비현실적이다. 쓰쿠루는 사라가 찾아준 상세한 정보 덕분에, 아직 죽지 않은 친구 3명을 차례로 찾아가 만난다. 그리고 작가의 처음 구상과 달리, 일방적이지 않은 방식의 매듭을 지으며 다시 이별한다.

좋은 이별 자체는 비현실적이지 않다. 좋은 이별이 낯설다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뿐이다. 비현실적인 건 이별을 복각할 기회다. 하루키가 사라의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면 평온한 듯 지내던 쓰쿠루는 일상의 연속으로 죽음의 문을 열었을 거다. 그쪽이 현실적이지만, 그렇게 쓰이지 않아 다행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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