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용이한 통치를 위해 우리 머릿속에서 ‘민족’이란 단어를 지워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부정하고,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다 같은 황국신민이라는 일시동인(一視同仁) 사상을 주입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에 맞서 1920년 창간 첫 사업으로 단군영정을 현상공모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단군 탄생 성지인 백두산에 기자들을 특파해 민족의 영산(靈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1921년 8월 함경남도청이 백두산 탐험 등산대를 조직하자 동아일보는 사회부 기자 민태원과 사진반 야마하나를 보냅니다. 소설가이기도 했던 우보 민태원은 훗날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수필 ‘청춘예찬’을 발표한 인물입니다. 동아일보 창간 동인인 야마하나는 일본인이었지만 한복을 즐겨 입고, 좋은 사진만을 위해 동분서주한 1세대 사진기자였습니다.
이들은 8월 8일 함흥을 출발해 홍원, 북청, 혜산진을 거쳐 16일 드디어 백두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민태원은 그날그날의 여정을 짧게 보도한 데 이어 귀환한 뒤 21일자부터 르포 ‘백두산 행’을 연재했습니다. 야마하나도 매 기사마다 ‘백두산 탐승 화보’라는 이름으로 매 기사마다 귀한 사진을 곁들였습니다. 동아일보는 17회나 되는 이 시리즈를 모두 1면에 배치해 백두산 탐험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특히 11년 전 국권을 잃은 날인 8월 29일자에는 1면 시리즈 외에 3면 상단에 백두산 천지를 촬영한 대형 파노라마 사진을 실었습니다. 이 사진에는 천지의 경관을 생생하게 묘사한 긴 사진설명 겸 기사가 붙었는데 성산(聖山)에 걸맞게 신비로움을 강조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신비 중의 신비로, 영구한 세월 깊이 감춰져 있던 곳이니… 어떤 때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천둥벼락과 우박, 눈비를 부르는 일도 있다.’
민태원은 ‘백두산 행’에서 역설적으로 평범함, 따뜻함에서 백두산의 위대함을 실감했다고 했습니다. 9000척(약 2727m)을 오르는 길이 극히 어려울 것이라 겁먹었는데 모나지 않고 원만해 종일 걸어도 피로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고, 천지의 물도 백두산에 닿기 전 신무치나 무두봉의 물이 골수를 찌르는 듯 차가웠던 것과 달리 복중(伏中)의 수돗물 같았다고 말이죠. 범접하기 어려운 위대함이 아니라 민족을 보듬어 안는 위대한 산임을 강조한 겁니다. 그는 천지를 둘러싼 외륜산 중 하나인 대각봉의 ‘대한독립군 기념’ 말뚝, 조선 숙종 때 청나라와의 국경을 짓기 위해 세운 백두산정계비 등을 다루며 독자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민태원의 해박한 지식과 반듯한 의식도 곳곳에 드러납니다. 함남 홍원 장날, 저자에 모인 사람의 8할이 부지런한 북선(北鮮)의 여인들인 것을 보고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말이 용모의 단정함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거라는 단상을 적었습니다. 또 포태동과 허항령 사이 임연수 명산지에서는 임연수라는 사람이 이 생선을 처음 발견했다는 데서 임연수가 유래했고, 명태 역시 함북 명천에 살던 태(太) 씨의 어획이 시초여서 ‘명천 태 씨’에서 비롯됐다고 전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지면에 그치지 않고 ‘백두산 행’ 연재가 한창이던 8월 27일 밤 종로 중앙청년회관(지금의 YMCA회관)에서 백두산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강사로 초청한 국어학자 겸 역사학자 권덕규는 “단군이 탄생한 태백산이 곧 백두산이며, 이곳을 근원으로 한 조선민족은 영특한 민족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태산도 실상은 백두산 줄기가 뻗어내려 산둥반도와 태산이 된 것이다”라고 해 자부심을 한껏 고취했습니다. 수천 청중은 민태원의 경험담에 이어 상영된 20여 장 환등(幻燈‧슬라이드)으로 백두산의 실경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5년 뒤 1926년에는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覲參‧존경하는 이를 찾아가 뵘)’을 89회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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