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피아니스트 김상헌씨와 사제인연 10년 이어온 장형준 교수
비장애인들 틈서 숨죽였던 김씨… “교수님 덕분에 학교생활 힘얻어”
“그래, 그동안 어떤 곡들을 쳐 왔니?”
이런 게 운명인 걸까. 2010년 3월. 장형준 서울대 피아노과 교수(58)가 첫 질문을 던지자 식당은 갑자기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당황한 장 교수. 그런데 그 앞에 앉은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레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사랑하는 제자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상헌 씨(29)와의 첫 만남이었다.
“실은 되게 두근거렸어요. 교수 생활 16년 만에 시각장애인 학생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어떤 난관도 함께 이겨내야지’ 하고 혼자 들떴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가 머리를 쾅 때렸어요. 그동안 이 아이는 어떤 ‘삶의 터널’을 지나왔는지 몰랐던 거죠. 때로는 어둡고 힘겨웠을 시간들을 겪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텐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13일 장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제자와의 인연을 들려주기 시작하자 김 씨는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10년 전 시각장애인 최초로 서울대 피아노과에 입학한 그에게도 장 교수는 선명하고 뚜렷한 존재였다. 이후에도 아직 시각장애인 입학생은 없다. 김 씨는 “교수님은 제 마음을 한눈에 알아보시고 어루만져 주셨다”고 했다.
“신입생 때 강의를 듣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정작 레슨 시간엔 실력 발휘가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풀죽었단 걸 아시곤 조용히 챙겨주셨습니다. 고전할 때도 모른 척 넘어가주셨고, 학생들에게 부탁해서 어디서도 외롭거나 다치지 않게 배려하셨어요. 교수님 덕분에 학교에서 ‘인싸’로 지낼 수 있었죠.”
하지만 장 교수는 모든 공을 제자에게 돌렸다. “상헌이는 처음부터 완성형이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처음부터 기교는 거의 마스터한 상태였어요.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니 기억력도 어마어마했죠. 오히려 제가 이 친구를 만난 게 ‘행운’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음악적 교감은 언제나 서로를 충만하게 했다. 장 교수는 레슨실에서 김 씨를 마주할 때마다 “항상 뭔가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공식적인 사제 인연은 학부 4년, 석사과정 2년으로 끝났지만 두 사람은 구애받지 않았다. 김 씨는 지금도 연주회를 앞두고 벽에 부딪힐 때면 장 교수를 찾아간다. 김 씨는 “졸업생이 자꾸 찾아와 귀찮게 하는데도 항상 반갑게 맞아주신다”고 했다.
“예전엔 상헌이를 좀 혹독하게 가르쳤죠. 하루는 수업이 끝난 뒤 완전히 지쳐서 뻗어 있더라고요. 별로 미안하진 않습니다, 하하. 상헌이의 연주가 이젠 많이 성숙해졌어요. 특히 슈만과 바흐 곡들을 칠 땐 평가자가 아닌 감상자 위치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듣게 됩니다. 올해 7, 12월로 예정된 앙상블과 독주회 땐 조용히 찾아가 객석에서 그의 음악을 즐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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