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읽으며 자란 80년대생, 장르소설을 깨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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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출판계 키워드는 ‘장르문학’

영국에 판권을 수출한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최근 출판사 아르떼가 선보인 SF 무크지 ‘오늘의 SF’ 1호, SF계의 샛별 소설가 김초엽, 장르문학 비평서 ‘장르문학 산책’, 로맨스 작가 알파타르트의 ‘재혼황후’(왼쪽부터). 교보문고·네이버웹툰 제공
영국에 판권을 수출한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최근 출판사 아르떼가 선보인 SF 무크지 ‘오늘의 SF’ 1호, SF계의 샛별 소설가 김초엽, 장르문학 비평서 ‘장르문학 산책’, 로맨스 작가 알파타르트의 ‘재혼황후’(왼쪽부터). 교보문고·네이버웹툰 제공
“좋은 공상과학(SF) 소설 작가는 죽은 작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 ‘죽음’에서 평론가 장 무아지는 주인공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독설한다. 베르베르는 자신을 똑 닮은 가브리엘의 목소리로 장르문학 작가로 겪은 설움을 토해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평가를 받아온 장르문학이 올해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2019년 주요 출판계 키워드로 ‘주류가 된 장르’를 꼽으며 “장르소설 판매량이 증가했고 장르비평이 늘어났으며, 장르 전문 출판 브랜드가 속속 등장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SF, 판타지, 추리, 로맨스, 무협…. 여러 장르 가운데 SF의 도약이 특히 눈부셨다. 서구권이 강세를 보였던 SF에서 최근 1, 2년 새 국내 작품들이 질적, 양적으로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김보영 김창규 정보라 곽재식 작가 등이 꾸준히 활약하고 있고, 김초엽 작가는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이름을 알렸다. 순문학과 SF를 넘나드는 장강명 정세랑 작가도 팬층이 두껍다.

박상준 SF협회장은 “과학기술을 몰라도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 대거 등장했다”며 ‘친근해진 SF’를 이유로 들었다. 협회를 만들고 신진 작가를 양성하는 등 제도권 진입을 위한 SF계 관계자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판타지는 영어덜트(young+adult)와 만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 김이환 작가의 ‘양말 줍는 소년’ 등 환상을 녹여낸 영어덜트 소설이 주목받았다. 청소년기의 혼란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영어덜트 서사와 판타지적 요소가 잘 맞아떨어진다는 설명이다.

로맨스는 웹소설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인기 비결은 여성의 성장 서사. 한 웹소설 작가는 “남성 또는 결혼이 행복의 열쇠라는 로맨스 공식은 옛말이다. ‘재혼황후’ 같은 인기 로맨스 웹소설은 공통적으로 여성이 틀을 깨고 세계와 싸우는 서사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론 비평 분야의 확장도 주목할 만하다. ‘장르문학 산책’ ‘비주류 선언’ 등 올 한 해 10편이 넘는 장르문학 비평서가 출간됐다. 장르문학을 다루는 비평 잡지 ‘미스테리아’ ‘오늘의 SF’와 웹진 ‘크로스로드’ ‘거울’도 있다.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아작’ ‘황금가지’ ‘북스피어’ ‘요다’ ‘허블’이 대표적이다. ‘고즈넉이엔티’는 장르소설 20여 편을 영화 드라마 웹드라마로 만드는 판권 계약을 국내외 제작사와 맺어 장르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열었다.

이융희 문화연구가는 “1970, 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리얼리즘 문화에 익숙하다. 이에 비해 1990년대 청년기를 보낸 현재 40, 50대는 ‘퇴마록’ ‘드래곤라자’ 같은 장르문화를 경험했다. 이런 토양을 토대로 장르문학이 전성기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판타지#장르소설#장르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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