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웠던 만세시위, 日헌병 무차별 발포로 유혈사태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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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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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 한성대 강사, 평남 강서군 ‘사천 3·1운동’ 논문 발표

1919년 평안남도 ‘사천 3·1운동’ 관련 재판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1년 12월 2일 기사 ‘총화(銃火)에 이자(二子)를 구실(具失)하고’. 주동인물 가운데 한 명인 윤석원 장로는 3·1운동에 참여한 창도, 관도 두 아들을 일본 헌병의 총에 잃었고 자신은 도피했다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21년 10월 체포된 뒤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동아일보DB
1919년 평안남도 ‘사천 3·1운동’ 관련 재판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1년 12월 2일 기사 ‘총화(銃火)에 이자(二子)를 구실(具失)하고’. 주동인물 가운데 한 명인 윤석원 장로는 3·1운동에 참여한 창도, 관도 두 아들을 일본 헌병의 총에 잃었고 자신은 도피했다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21년 10월 체포된 뒤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동아일보DB
“조선독립만세의 소요가 조선 각지에 발발함을 따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오륙천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중략)…강서군 반석면 사천리 헌병주재소를 향하고가는 길에 그 헌병주재소로부터 총소리가 일어나며 선두에 섰던 청년대가 붉은 피 속에 삼대 쓰러지듯 넘어지는 광경을 본 노인대는 주재소에 불을 놓고….”(동아일보 1921년 12월 18일 기사 ‘증언은 피고에게 유리’)

3·1운동 초기임에도 매우 격렬한 항쟁을 벌였던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을 조명한 연구가 나왔다. 기독교 세력이 주도한 사천 3·1운동은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과 더불어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던 3·1운동으로 꼽힌다.

박경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강사는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98집)에 게재할 예정인 논문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에서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됨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일본 헌병들이 시위 시작부터 시위대에 총을 무차별 난사하면서 완강히 저항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버지 조진탁 장로와 함께 사천 3·1운동에 참여한 항일투사 조형신. 동아일보DB
아버지 조진탁 장로와 함께 사천 3·1운동에 참여한 항일투사 조형신. 동아일보DB
사천 지역에 3·1운동 소식을 처음 전한 건 평양에서 만세를 부른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반석교회의 조진탁 장로(1867∼1922)였다. 원장교회의 임이걸 장로(1898∼1961) 역시 평양에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원장리로 챙겨 왔다. 사천 3·1운동은 대동군과 강서군의 원장, 반석, 사천, 산수리 교회 등 4개 교회가 연합해 기획했다. 거사일은 사천시장 장날인 3월 4일. 계획이 발각돼 10여 명이 체포됐지만 원장리 합성학교로 장소를 변경해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거사 당일 임이걸은 “우리의 힘으로 자주독립 해야 할 것이며 독립을 해야 살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난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앞서 체포된 이들을 구하려 사천 헌병주재소로 향했지만 일본 헌병들과 보조원들이 총을 난사했다. 여기서 무려 시위대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논문은 “일제는 3월 1일 평양 시위가 대규모로 진행되자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걸 확실하게 막고자 운동 초기부터 무차별 폭력으로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가족과 이웃이 총탄에 쓰러지는 걸 보고 격분한 군중들은 맨주먹으로, 또는 돌을 들고 헌병들에게 대항했고, 헌병분재소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헌병분재소장 사토 지쓰고로와 조선인 헌병 보조원 3명이 사망했다.

3월 6일 원장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이 끝난 뒤 유가족을 비롯한 200여 명이 다시 만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일제의 보복은 거세고 집요했다. 기독교 신자 중심으로 400여 명을 붙잡아 20여 일간 고문했고, 교회 지도자 등 49명을 평양 검사국에 송치했다. 주동 인물들은 사형, 무기징역, 징역 15년 등을 받았고, 검거를 피해 도피한 이들도 궐석 재판을 통해 극형이 언도됐다. 조진탁 장로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헌병과 보조원을 살해한 혐의로 1922년 10월 사형당했다. 이들의 형 집행이 보복적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합성학교를 설립한 지석용 장로는 다행히 만주로 몸을 피했지만 15년 뒤인 1934년 중국 대련에서 체포됐다.

논문은 “사천 지역민은 3·1운동 이후에도 사천대한독립청년회,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천 3·1운동#조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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