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 예브게니 키신 같은 클래식계의 ‘흥행 보증수표’도 아니었다. 국내에서 자체 제작한 오페라였다. 더구나 오페라는 서울도 힘들다는데 돌풍의 진원지는 대구였다. 16일 오후 대구오페라하우스 로비에는 ‘전석 매진’ 팻말이 나붙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 베르디 ‘돈 카를로’는 이날 객석 점유율 100%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4층 객석까지 가득 찬 청중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돈 카를로’는 베르디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장대한 길이와 스펙터클을 자랑한다. 베르디가 가장 좋아했던 악기인 첼로의 육중한 저음에 실리는 3막 필리포 2세의 고백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어’. 베이스 연광철은 무대에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을 잃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노래’ 아닌 ‘말’을 하는 연광철이 왜 세계 정상의 거장으로 대우받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왕비 엘리자베타를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은 이제 드라마틱한 대형 가수의 자질을 갖추고 완벽에 가까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베르디 후기 오페라를 넘어 바그너까지 아우르는 미래가 점쳐졌다. 바리톤 이응광의 로드리고는 하늘같이 고고한 품격으로 ‘베르디 바리톤’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연출가 이회수가 공들여 만든 무대는 2개로 수평 분할됐다. 상층부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각 장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종교재판관은 시종일관 2층을 서성이며 나머지 인물을 감시했다. 신권(神權)이 왕권(王權)을 능가하는 연출가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했다.
20억 원의 예산으로 무려 5개의 새 오페라 프로덕션을 제작한 대구국제오페라축제. 16회에 접어든 축제는 승승장구 중이다. 어찌 보면 ‘기현상’이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전국 문예회관 대부분이 1년에 자체 기획 오페라 한 편 올리기도 힘든 게 우리 현실이다. 10월 21일 폐막까지 축제 주요 오페라는 매진이 임박했다. 공연장 시설은 열악했다. 기존 장비로 부족해 추가로 빌려온 조명으로도 ‘돈 카를로’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일군 쾌거라 더욱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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