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범죄소설은 삼류? 시대를 투영한 문학작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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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계정민 지음/376쪽·1만8000원·소나무
19세기 인기 끈 뉴게이트 소설, 급진주의적 관점 담은 추리물… 당시 영국 정부로부터 탄압
체제에 저항하고 타협하며 성장해 온 범죄소설 “제대로 문학적 평가 받아야”

영국 런던 뉴게이트감옥에서 처형됐던 범죄자들 일대기를 담아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뉴게이트 캘린더’에 실린 삽화. 뉴게이트 소설은 이 일대기에서 중심인물을 빌려왔지만, 법을 지배계층의 억압장치로 보고 범죄자를 영웅시함으로써 기존 관점을 뒤집었다. 소나무 제공
영국 런던 뉴게이트감옥에서 처형됐던 범죄자들 일대기를 담아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뉴게이트 캘린더’에 실린 삽화. 뉴게이트 소설은 이 일대기에서 중심인물을 빌려왔지만, 법을 지배계층의 억압장치로 보고 범죄자를 영웅시함으로써 기존 관점을 뒤집었다. 소나무 제공
추리소설의 고전인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부터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 이르기까지 범죄소설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문학 장르다.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대표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는 국내 많은 작가들의 워너비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작품들을 진지한 비평과 연구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장르소설의 위상이 낮은 한국에서는 특히 그랬다.

영문학과 교수이자 25년간 범죄소설을 연구해 온 저자는 지금까지 범죄소설을 바라보던 이런 시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본질적으로 범죄소설이다. 최초의 인간들은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됐고 그들의 자녀는 형제를 살해했다. 태초부터 범죄가 영미소설의 원천을 형성한 셈이다. 그런데도 범죄소설은 항상 평가절하돼 왔다. 콜린스의 추리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다른 영국 소설의 진부함을 뛰어넘는 탁월함과 근대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19, 20세기 범죄소설의 계보를 추적해 나간다. 시작은 뉴게이트 소설이다. 뉴게이트 소설은 1830년경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범죄소설이다. 피지배계층이 당대 법률·경제 제도의 피해자라는 급진주의 관점을 담은 추리물로, 범죄자를 낭만적이며 영웅적 인물로 그려내 노동계급이 특히 열광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의 선거권 획득을 위한 차티스트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체제 위협에 대한 공포심이 커지는 중에 등장한 뉴게이트 소설은 곧바로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 됐다. 추리소설이 경멸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것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고 저자는 암시한다.

국가가 개입해 뉴게이트 소설의 확산을 막는 등 탄압이 이뤄지는 와중에 문학사적으로는 체제와의 절충을 시도하는 반(反)뉴게이트 소설들이 등장했다. 범죄자가 아니라 탐정의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독자를 범죄자에게서 격리시키는 추리소설이다. 저자는 새커리의 ‘캐서린’,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그런 사례라고 주장한다.

이후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시리즈 등으로 이어진 추리소설은 체제와의 타협을 통해 안착한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탐정으로 백인 귀족 남성이나 가부장적 관점을 가진 무성적 노처녀를 내세움으로써 젠더, 인종, 규범과 관련된 지배계층의 이상을 대변하며 살아남은 것.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다시 한 번 변화를 꾀한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은 허무하고 비합리적 세상에서 노동계급의 좌절과 분노를 대변한다. 팜 파탈은 자본가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로 소설 속에서 항상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저자는 이렇게 추리소설이 시대에 따라 지배가치에 저항하면서 분투해 왔음을 강조하며 “범죄소설이 이제는 온당한 문학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와 달리 대부분의 추리물이 충실한 장르 문법으로 체제와 타협해 온 궤적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아쉽다. 책의 마지막 문장에는 공감한다. ‘범죄소설은 어쨌든 문학의 주요 장르로 남을 것이고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 이것만큼 재밌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범죄소설의 계보학#계정민#범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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