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압록강 영토 얻은 고려의 실리 유연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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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세사학회 22일 학술대회 개최… 고려시대 대중국 외교 연구 발표

고려는 1117년 금과의 싸움에서 패한 거란 장수가 압록강 하구 동쪽 ‘보주(의주)’성을 고려에 넘기도록 유도했다. 사진은 고려 의주성의 군사 지휘소였던 ‘통군정’으로 조선시대 고쳐 지은 것이다. 동아일보DB
고려는 1117년 금과의 싸움에서 패한 거란 장수가 압록강 하구 동쪽 ‘보주(의주)’성을 고려에 넘기도록 유도했다. 사진은 고려 의주성의 군사 지휘소였던 ‘통군정’으로 조선시대 고쳐 지은 것이다. 동아일보DB
한국인들이 지역 내 신흥 강자의 부상과 파워 밸런스의 재조정을 맞닥뜨리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고려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적지 않은 중원 패권국가의 공존과 교체를 겪으며 대체로 유연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중세사학회가 22일 부산대에서 여는 학술대회 ‘고려시대 대중국 외교 현안과 대응 방식’의 발제문을 미리 살펴봤다.

고려 외교사에는 남북으로 오늘날 한국의 영토를 규정한 사건들이 적지 않다. 정동훈 박사(서울시립대 박사후연구원)는 발표문 ‘몽골의 유산 상속 분쟁’에서 고려-명의 초기 외교에서 등장한 제주(탐라) 문제를 분석했다.

삼별초의 패배 뒤 몽골은 약 20년 동안 탐라를 직할 통치했고, 고려가 행정 관할권을 장악한 뒤에도 목마장과 말은 몽골의 소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위에 오른 명 홍무제(주원장)는 원의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천명한다. 발표문에 따르면 이는 몽골 제국이 보유하던 여러 권한이 모두 자신에게 귀속된다는 것으로 탐라 역시 명이 연고권이나 권익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탐라라는 섬은 고려 사람들이 개국한 이래로 주(州)를 설치하고 목(牧)으로 삼아왔습니다.”

고려 공민왕(오른쪽)과 노국 공주의 초상.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려 공민왕(오른쪽)과 노국 공주의 초상.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공민왕은 1370년 명에 표문을 보내 △제주는 고려가 관할하겠다 △몽골인 목자(牧子)들도 고려에서 관할하겠다 △원 조정에서 풀어 먹이던 말은 명에 진헌하겠다고 제안한다. 선제적으로 탐라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 명에서 제주에 대한 권리를 부풀려 주장하는 상황을 막은 것이다.

명은 영유권에 대한 즉답을 피했다. 고려는 몽골이 파견한 목장 관리자들(牧胡·목호)이 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민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명에 파견해 탐라 출병 의사를 밝힌다. 고려사와 명태조실록에 나오는 명의 답변은 온도차가 있다. 정동훈 박사는 “홍무제에게 탐라는 탐나는 이권이지만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며 “홍무제의 답변 자체가 일관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민왕은 강수를 둔다. 1374년 최영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을 보내 탐라 정벌을 강행하고, 결과를 명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고려의 실효 지배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정 박사는 “공민왕의 탐라 정벌은 몽골 제국이 동아시아에 남긴 유산을 실력 행사로 차지하는 과정의 일부”라며 “공민왕 말년까지 고려는 정확한 정세 분석과 과감한 행동으로 실리를 챙겼다”고 말했다.

박윤미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발표하는 ‘고려의 보주(保州) 수복과 금의 승인’에서도 고려의 실리 외교를 엿볼 수 있다.

보주는 압록강 하류 동쪽의 의주(義州)로 고려가 ‘강동6주’를 설치했지만 거란이 1014년 강점해 수복해야 했다. 고려는 새로 흥기한 여진(금)이 보주의 거란군을 공격해 함락시키기 전에 보주를 차지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을 맞았다. 고려는 금의 공격을 받아 식량이 떨어진 거란군을 상대로 쌀을 무기로 외교적 회유와 압박을 병행했고, 패배한 거란군으로부터 피 흘리지 않고 보주성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금은 승인을 보류하고 고려의 영토라는 걸 한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박윤미 연구원은 “고려는 같은 시기 송나라의 원병 요청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한편 금이 원하는 ‘서봉(誓封·충성맹세 문서)’을 제출하면서 압록강을 국경으로 얻어냈다”고 말했다.

학술대회에서는 ‘10세기 고려의 대송 외교와 정책기조’, ‘14세기 초반 요양행성(遼陽行省)의 합성(合省) 건의와 고려-몽골 관계’ 등도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민왕#삼별초#고려 외교#한국중세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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