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하나의 방, 무한 상상의 시간이 펼쳐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 지음/홍유진 옮김/298쪽·1만6800원·미메시스

하나의 같은 공간을 표현한 그림들. 언젠가 이곳에서 누군가 태어났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수백 년 전 호수였던 공간에서 얼마 전엔 전화벨이 울렸다. 격투가 벌어졌고, 느닷없이 창문 안으로 야구공이 날아들었고, 그녀가 이별을 통보했다. 언젠가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한 톨 예외 없이. 미메시스 제공
지금 서 있거나 앉았거나 누운 자리를 잠시 내려다보라.

‘내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 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며 서고 앉고 누워 있었을까.

이 책은 말없이 그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의 도구는 글이 아닌 그림 150장이다. 고풍스러운 모양새의 창문과 벽난로만 덩그러니 놓인 빈 방 이미지로 첫 페이지가 열린다. 거기에 안락의자와 책꽂이를 들여놓은 모습, 벽지와 커튼을 바꾸고 벽난로 위에 거울을 걸어둔 모습, 그림액자를 붙이고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한 뒤의 모습이 차례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림을 엮은 차례가 시간 순이 아니다. 2014년 어느 날의 장면에서 시작하더니 문득 1957년으로 갔다가 또 1942년, 느닷없이 1623년까지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의 그곳에는 창문과 벽난로가 있었을까. 책이 첫머리에 던진 한 가지 질문은 방향과 간격에 제한을 두지 않은 시간의 점프를 거듭 거치며 무한의 답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미국 뉴저지주 퍼스앰보이시의 집 거실을 고정시점으로 그린 이 그림들로 세계 최대 국제만화축제인 프랑스 앙굴렘 페스티벌 최고상인 ‘황금야수상’ 올해 수상 작가로 선정됐다.

책면 회의 과정에서 이 책에 대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비판 의견도 있었다. 비슷한 의견을 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시공의 연결에서 무한의 연상을 끄집어낼 길을 찾는 독자에게 이 책은 분명 매력적인 탈출구다.

어떤 공간을 고정시점에서 바라본 이미지의 조합이 얼마나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는 웨인 왕 감독이 영화 ‘스모크’(1995년)에서 매일 똑같은 시각에 같은 앵글로 거리를 촬영하던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이 책의 고정시점 이미지들이 전하는 스토리텔링은 그보다 한 수 위다. 얼핏 평면적 나열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규모의 갈등이 빽빽이 얽혀 전개된다. 소파가 놓이고 고양이가 웅크려 있던 자리의 다른 시간에서 화살이 날아가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화재가 일어난다. 책 중반 이후 작가는 시선의 시점을 기원전 30억 년 전, 서기 2만2175년까지 뻗어낸다.

지금 발 딛고 선 공간이 품은 기억을 상상해 보자. 언젠가 누군가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한들 전혀 기괴한 일이 아니다. 시간을 건너뛴 이미지의 콜라주 틈새로 읽는 이의 기억과 상상을 채우는 유희의 재미가 적잖다. 순간 아찔해질 수도, 아무 느낌 없이 덤덤할 수도 있다.

작가는 한국어판 표지 초안을 받아본 뒤 “계약서 조항대로 한글 제목과 출판사 로고를 삭제해 달라”고 출판사에 요청했다. 편집 담당자는 “회사 로고를 표지에 넣지 않은 건 이 책이 처음”이라고 했다. 작가는 또 속지 가장자리 여백 등을 조절할 수 없게끔 계약한 책 규격에 딱 맞춘 크기로 내용 이미지 파일을 보내왔다.

뒤표지를 덮고 나니, 유난 떨 만했구나 싶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내 자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