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마을] 소녀와의 약속 어긴 죄…평생으로 갚은 당 할머니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7월 6일 05시 45분


전남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축두마을 주민들은 몽중산의 제당에서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제당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해 지금도 신성하게 여겨지고 있다. 고흥(전남)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전남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축두마을 주민들은 몽중산의 제당에서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제당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해 지금도 신성하게 여겨지고 있다. 고흥(전남)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5 풍양면 고옥리 축두마을

오랜 세월 척박했던 땅. 그만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강하고 질긴 태도와 능력으로써만 세상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쌓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밝고 슬프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 설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쌓여 전해져오고 있다. 전남 고흥군을 다시 찾는 이유다. 지난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고흥의 이곳저곳 땅을 밟으며 다양한 이들을 만난 스포츠동아는 올해에도 그곳으로 간다. 사람들이 전하는 오랜 삶의 또렷한 흔적을 확인해가며 그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한다. 매달 두 차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어미 병 낫게 해줄 테니 100일 정성 드려라’
100일째 날 술에 취해 깜박 잠든 당 할머니
제당서 쓰러진 소녀…어미까지 숨을 거두고
이후 몽중산 들어와 술도 끊고 마을에 헌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행동은 중요하다. 특히 타인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기는 잘못이라면, 반드시 반성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만회해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여기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축두마을의 제당을 지키는 할머니가 그랬다. 당 할머니는 과거 잠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 소녀와 나눈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 할머니는 안일했던 자신을 탓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상황을 피하는 건 비겁할 뿐이다. 비록 소녀를 도와주지 못했지만 당 할머니는 그 미안함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고쳤다. 평생 마을의 안녕을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한때 과오를 저지른 당 할머니이지만, 주민들은 당 할머니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과오를 평생의 보답으로

전남 여수 장군도에 아픈 어머니를 모시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병이 빨리 낫기를 바라며 마을 뒷산의 제당에서 빌고 또 빌었다. 소녀의 간절한 기도에 감동을 받은 당 할머니는 어느 날 나타나 말했다.

“앞으로 100일 동안 정성을 드려라. 마지막 날 어미의 병을 낫게 할 약초를 줄 것이다.”

소녀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같은 시간에 와서 기도를 했다.

드디어 100일째 되는 날. 우연찮게 각 마을 당 할머니들의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오랜만의 모임에 최고령 당 할머니가 약주 제안을 했지만, 당 할머니는 ‘거사’를 앞두고 술에 취할까 거절했다. 하지만 평소 술을 좋아한 당 할머니는 잔에 채워진 술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에잇, 뭐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술을 들이켰다. 이내 술과 잠에 취해 쓰러졌다.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려 했으나 당 할머니가 눈을 떴을 때는 소녀가 기도를 마치고 산을 내려갔을 시간. 서둘러 제당 앞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소녀가 쓰러져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소녀의 어머니는 병이 악화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 할머니는 자신의 과오로 엄마를 잃은 소녀를 보고 자책했다. 마음이 편할 리 없는 당 할머니는 장군도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장군도 어부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축두마을 뒷산인 몽중산의 제당으로 옮겨 왔다.

이후 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고 마을 지키는 일에만 전념했다.

몽중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제당. 고흥(전남)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몽중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제당. 고흥(전남)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지금까지도 제를 지키는 사람들

당 할머니를 모시는 제당은 축두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몽중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제당에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산길을 따라 넝쿨진 풀을 헤치고 나아가 우거진 대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장소인 만큼 예부터 신성하게 여겼음이 느껴진다.

마을노인회장인 김창길(73)씨는 “제를 지내는 날에는 당 주변에 금줄을 치고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다”며 “개고기를 먹은 사람과 갓 출산한 사람도 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조상들에게 전해들은 것처럼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1월8일 제를 지냈다.

제사가 열리는 날은 마을 전체가 분주하다. 특히 제사 음식 등 절차를 이끌 책임자는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돈한다. 마을의 1년 운명이 달린 제사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

하지만 제사를 진행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준비 과정이 복잡한 탓도 있었지만 “제를 잘 못 지냈다는 원망”이 두려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 현재는 마을 이장이 맡고 있으며, 풍작을 기원하며 본격적으로 봄이 오기 전인 3월1일(음력)에도 제를 지낸다.

김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인데 손이 많이 간다고 멈출 순 없지 않냐”며 “제사가 얼마나 소용이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마음의 문제다. 지금은 술 한 잔, 과일과 명태 정도만 올린다. 그래도 제사를 지내면 마음이 평안하다”며 웃는다.

● 설화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고흥(전남) | 백솔미 기자 b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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