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선시대 광화문 앞길은 왕과 서민 잇는 통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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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김동욱 지음/364쪽·1만8000원·집

1900년대 서울 광화문 앞 육조대로 풍경(왼쪽)과 육조대로 좌우에 늘어선 관부들을 표시한 조선시대 고지도. 집 제공
1900년대 서울 광화문 앞 육조대로 풍경(왼쪽)과 육조대로 좌우에 늘어선 관부들을 표시한 조선시대 고지도. 집 제공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나는 난생처음 경복궁 앞 왕경대로(王京大路)의 웅장함을 잠시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경찰 통제에 따라 10차로 도로가 차단되면서 광화문과 광장은 하나로 연결됐다. 광화문에서 광장 끝 이순신 장군 동상까지 약 600m에 이르는 거대한 주작대로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평소 광화문 앞 차로에 가로막힌 경복궁은 마치 박제된 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광화문 앞 육조대로(六曹大路)는 최고 권부와 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앞 대로의 연원을 다양한 문헌을 통해 추적하고 건축사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통상 건축사 책은 궁궐 전각이나 고택(古宅)처럼 건물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궁궐 문을 둘러싼 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건축사 분야 권위자가 쓴 책답게 역사와 건축을 함께 아우르는 혜안이 돋보인다.

고대부터 도성 내 도로는 왕성과 관청, 주거지 등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구획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최근 경주 왕경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황룡사지 주변 도로망이 신라시대 방리(方里)제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궁궐 앞길은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숨통 같은 존재다. 담장 바깥 세계까지 살펴봐야 궁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직장이 광화문에 있어서 그런지 육조대로의 변천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육조대로는 말 그대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최고 관부였던 이·병·호·예·형·공조 청사들이 좌우로 늘어선 큰길을 뜻한다. 조선 정궁(正宮)의 위상에 걸맞게 경복궁은 나머지 궁궐들보다 훨씬 큰 앞길(육조대로)을 거느렸다. 왕이 선왕들의 능을 참배하거나 중국에서 온 사신을 영접하고 과거시험을 거행할 때마다 육조대로는 주된 무대였다. 이런 행사에선 왕과 관료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구경꾼으로 참여했다.

경복궁을 지을 때 고려시대나 중국처럼 폐쇄적인 황성(皇城) 구조를 따르지 않고 종묘와 사직단, 육조를 일반 주거지와 분리하지 않은 사실도 주목된다. 중국은 종묘와 사직단을 황성 안에 설치해 황제가 제의를 지내러 이동하는 모습이 백성들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또 최고 관부도 서민들과 분리돼 황성 안에 따로 뒀다.

그러나 조선은 종묘와 사직단이 민간 주거지 안에 있어 국왕의 행차를 누구나 지켜볼 수 있었다. 육조도 저잣거리와 연결돼 고관대작의 움직임이 모두 드러났다. 최고 지배자의 동선이 투명하게 노출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광화문과 육조대로에 영광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 위기에 봉착한 1894년 육조 명칭이 바뀐 데 이어 일제강점기 들어 육조 대신 식민 통치기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현재는 ‘세종대로’로 불리는 광화문 앞 큰길의 운명은 한반도의 그것과 함께했던 셈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김동욱#조선시대 궁궐#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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