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사랑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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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가을이 깊어갑니다. 저 너머에서 겨울이 서두르고 있습니다. 석양이 하루의 고통을 감싸 안으며 지듯이, 가을은 우리 삶의 상처들을 보듬고 깊어갑니다. 시인들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의 언어를 선사합니다. 저 유명한 푸시킨의 시구가 그렇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인간관계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는 앨프리드 더수자의 시구가 위무와 격려를 보냅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위로의 순간들이 지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곧, 사색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삶에 고통과 상처를 남기는 말과 행동들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철학자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고통을 직시하고자 하는 필요성이 진실의 조건이니까요.

 비뚤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고 북돋는 말은 오히려 무겁게 느껴집니다. 또 다른 억압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수자의 시구처럼 자기 다짐과 굳건한 의지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처주지 않으며 사랑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자신이 받았듯이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쉽게도 타자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건에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결말을 예고하는 동화나 설화 속에는 이 ‘상처의 역설’이 미완성으로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신데렐라는 어릴 적부터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 받는 삶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모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일상 속에서 육체적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 외상으로 마음도 상처투성이입니다. 다행히도 마법사 아줌마의 도움으로 왕자님과 행복하게 맺어집니다.

 그러나 신데렐라 이야기의 ‘속편’은 어떻게 될까요. 이야기의 이치에 맞는 속편은 이렇게 전개되지 않을까요. 우선 왕자님의 삶은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신데렐라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만, 상처주지 않을 줄은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상처받을 왕자 역시 그것을 되갚으려 하겠지요. 더구나 이제 신데렐라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왕세자비니까요. 주위 사람들에게도 심한 상처를 줄 수 있겠지요.

 운명의 장난으로 태어날 때부터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아간 ‘미운 오리 새끼’의 이야기도 그 속편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조의 정체성을 되찾았으니 아름다운 백조를 짝으로 맞겠지만,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진 백조가 자기 짝에게 상처를 주며 관계를 어렵게 끌고 가거나 그르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면 그 과정을 견뎌낸다 해도 상처주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색의 계절, 이 아련한 가을의 끝자락에서 생각해 봅니다. 오랜 상처의 아픔을 지닌 사람에게 ‘아프니까 인생이다’라며 앞을 보고 참고 견디라고 한다면, 또한 삶을 오로지 굳은 의지로 극복하라고 한다면, ‘사후 약방문’ 식의 위안이 아닐까요.

 우리는 고통의 근원을 잘 보아야 합니다. 상처받은 후에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일상에서 대하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사전 처방의 미덕과 지혜가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시구를 이렇게 고쳐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주지 않을 것처럼.’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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