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감처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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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처럼―권달웅(1944∼ )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만나
빨갛게 익은 감처럼
 
 이 시는 일종의 그림이다. 그림에서 아랫부분은 땅이다. 땅은 넓고 서리가 내려서 하얗다. 그림의 윗부분은 하늘인데 가을 하늘이라서 높고도 파랗다. 그리고 그림의 중간에, 땅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한 그루 감나무가 서 있다. 감나무에는 잎이 없고 오직 빨간 감만 매달려 있다. 잎이 없는 탓에, 하늘이 파랗고 땅이 하얀 탓에, 이 빨간 감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풍경에서 감나무는 사람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나무가 사람이라면, 감나무에 달린 감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가을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의 부산했던 마음, 어리석고 미련했던 마음을 다 버려야 하는 계절인 것이다. 오직 하나의 감만 남는 것처럼 중요한 것을 되찾는 계절이어야 하는 것이다. 빨갛게 익어가는 과일처럼 눈길도 깊어지고 마음도 깊어져 세상의 진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풍경을 보여 주었지만 그 안에 가을의 진짜 의미가 꽉꽉 들어차 있다.

 곧 서리가 내릴 것이다. 따뜻한 외투와 든든한 울타리가 부족한 상실의 시대에 벌써 추위가 다가온다니 걱정이 앞선다. 가뜩이나 마음도 춥고 스산한 시대라서 추위가 달갑지 않다.

 그런데 이런 찌푸린 표정으로 가을과 겨울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세상과 마음에 서리가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레 분노하고 움츠러들 수만은 없는 일이다. 원래 우리의 가을은 이렇게 서럽고, 반갑지 않고, 걱정스러운 가을이 아니었다. 시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의 가을은 가치 있었다. 품위 있는 국화가 향기를 전하고, 추수의 결실에 대해 감사하며, 깊어가는 세월에 고개 숙이던 시기였다. 이렇게 스산하고 쓸쓸한 것은 우리 가을의 탓이 아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권달웅#감처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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