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피천득 그림자 너무 커… 작가 안돼서 다행”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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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블 ‘디토’ 연주 위해 내한한,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

미국에 거주하며 2008년부터 한국을 오간 스테판 피 재키브는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문화, 상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해 나도 모르게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크레디아 제공
미국에 거주하며 2008년부터 한국을 오간 스테판 피 재키브는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문화, 상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해 나도 모르게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크레디아 제공
화려한 배경 때문에 재능이 드러나지 못할 때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32)가 그 경우였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집안 내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수필가 고 피천득 선생(1910∼2007)이다. 부모(피서영 보스턴대 물리학 교수, 로먼 재키브 매사추세츠공대 물리학 교수)는 저명한 물리학자다. 2008년 앙상블 ‘디토’로 처음 국내서 연주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런 집안 내력에 가려 그의 음악성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9년간 함께한 앙상블 ‘디토’와 1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빈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위해 최근 내한했다. 28일 같은 장소에서 피아니스트 임동혁과도 협연한다.

먼저 가족의 후광이 짐이 되지 않는지 물었다. “가족 때문에 사람들이 저에게 호기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외할아버지 덕분에 한국에서 저만의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이력과 재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뉴잉글랜드음악원을 졸업했다. 데뷔 20년 차로 뉴욕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등 정상급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하며 스타 연주자로 거듭났다.

그래도 피는 속일 수 없는 법. 글도 쓴다. 자신의 공연 프로그램 책자의 글을 직접 쓰고, 시간이 날 때마다 페이스북 등에 자주 글을 남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요. 다만 음악만큼 노력하지는 않아요. 전 제가 작가가 되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됐다면 외할아버지의 그림자를 항상 느꼈을 것 같아요.”

그는 “외할아버지는 내가 음악가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며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어머니가 고등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는데, 외할아버지가 심사위원이었어요. 외할아버지가 대회 결과 발표를 앞두고 어머니를 불러 한 작품을 가리키며 제일 잘 썼다며 칭찬했대요. 근데 바로 그 작품이 어머니의 글이었던 거죠.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작가가 될까 봐 어머니 글을 탈락시켰대요. 하하.”

30대가 되면서 그는 음악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 연주 잘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작곡가의 메시지를 얼마나 잘 전달하고, 얼마나 관객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우선 생각한다. “연주자들은 흔히 관객이 그냥 음악이 좋아 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관객은 바쁜 시간을 쪼개 비싼 티켓을 사서 와요. 그런 관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연주자의 의무죠.”

오래 함께한 앙상블 ‘디토’로 활동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음악을 배웠어요. 특히 한국 관객과 교감을 쌓아 뜻깊었어요. 제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스테판 피 재키브#바이올리니스트#앙상블 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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