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열겠다는 분투, 부지런함… 딸에게서 배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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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 맨부커상 수상]소설가 한승원씨가 말하는 ‘딸이자 후배작가 한강’

《 “그 아이는 해초와 산호수 사이로 형광 같은 빛이 흘러드는 바다 밑처럼 깊은 생각속으로 아득하게 잠겨 있곤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검은 빛깔로 보일 만큼 짙푸른 하늘 저 멀리로, 수소 빵빵하게 담긴 기구처럼 동동 떠서 저 혼자만이 도달하는 어떤 별밭을 꿈같이 거닐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소설 ‘내 딸 미선이’ 중) 》
 
소설가 한강(가운데)이 2014년 ‘소년이 온다’로 만해문학상을 받은 뒤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 씨, 어머니 임감오 씨와 나란히 기념촬영을 했다. 창비 제공
소설가 한강(가운데)이 2014년 ‘소년이 온다’로 만해문학상을 받은 뒤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 씨, 어머니 임감오 씨와 나란히 기념촬영을 했다. 창비 제공
17일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어릴 적 공상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상문학상(1988년) 김동리문학상(2006년) 등을 받은 소설가 한승원 씨(77)가 1980년 지은 ‘내 딸 미선이’ 속 이 대목의 모델은 바로 그의 딸 한강. 한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소설의 다른 부분은 딸과 전혀 관계없지만, 공상을 좋아하는 열두 살 소녀의 순수한 모습을 묘사한 대목은 어린 강이를 관찰해 그 이미지를 가져왔다”고 했다.

1996년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가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배어났다.

“아이고 축하 전화 받느라 밥을 못 먹을 정도예요. 아내는 운동하러 나갔다가 소식 듣고 오는 길에 좋아서 춤을 췄다고 하네요.”

그는 딸을 “세계를 열려고 노력하는 작가적인 부지런함과 꾸준한 노력, 분투가 대단하다”라고 평가하며 “딸로부터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그 아이(한강)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썼어요. 그래서 (소설도) 문체가 굉장히 시적이고 신선한 데다 여성적인 섬세함까지 있어요. 거기다 내 문학세계가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세계라면 딸은 현대적인 신화를 창조하고 있어요. 인간의 폭력에 저항해 식물(나무)이 되고자 하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지요. 그 아이의 소설을 읽으면서 ‘보통 소설을 써서는 안 되겠다’고 느껴요. 더 많이 다듬고 공부하게 됐습니다.”

한강은 예전 인터뷰 등에서 아버지 한 씨를 ‘새벽부터 들리던 타자기 소리와 늘 피곤해 보이던 모습’으로 회상했다. 아버지가 본 한강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 아이는 드러내서 쓰지 않고, 늘 숨어서 썼어요. 밤에 딸이 잠을 안 자고 타자를 치는 소리가 들려오면 안타까웠습니다. 나 혼자서 치렀어야 할 (글쓰기의) 업(業)을 자식들한테 물려준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한 씨는 딸의 등단 전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소설가인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등단 뒤에도 한 씨는 딸에게 “이 소설 재미있더라” 정도만 말했다고.

오늘날의 한강을 만든 데에는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한강은 “어릴 적 집에 책이 많았고, 나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한강은 책의 제목을 읽으면서 공상에 잠겨 이런저런 얘기를 꾸미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 씨는 “자식들을 소설가로 만든 건 아이들 어머니”라며 딸의 수상을 아내의 공으로 돌렸다. “우리 세대 작가들이 전부 가난했거든요. 그러니 자식들이 백일장 같은 데 나가 문학적 감성을 발휘하면 어머니들이 보통 칭찬을 하는 대신 ‘너는 제발 법대, 의대를 가라’고 교통정리를 했잖아요. 그런데 아내는 내가 글 쓰는 게 좋았는지, 아이들이 글을 쓰면 그렇게 좋아했어요. 아내와 나는 강이가 영어를 잘하니까 영문과에 가기를 원했는데, (자기가 원했던) 국문학과에 들어갔지요.”

인터뷰 중 한 씨의 마지막 말은 세계적 작가로 주목받게 된 딸이자 후배에 대한 고마움과 흐뭇함이 가득했다. “자식의 가장 큰 효도는 부모를 뛰어넘는 것이죠. 강이가 나를 뛰어넘어 고마워요. 하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맨부커상#한강#채식주의자#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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