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박물관=인간의 충동을 길들여 가둔 거대한 미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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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루브르: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백상현 지음/300쪽·1만6000원·위고

위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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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공간은 단순한 감옥이 아닌 ‘미궁’이다. 감옥과 미로가 수인을 가두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감옥은 감금돼 있다는 절망적 사실을 명백히 인지시켜 서서히 질식시킨다. 미궁의 특징은 출구가 있다는 점이다. 잘 만든 미로의 조건은 출구에 닿을 수 없도록 만든 정교함이다. 더 잘 만든 미로는 출구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가능성의 환영을 유지하는, 정교한 미혹의 기술을 보여준다.”

책은 이 글 위에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의 프레스코화 ‘다이달로스와 파시파에와 나무 소’(사진)를 붙였다. 흰 수컷 소에 욕정을 품은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에게 만능기술자 다이달로스가 소 가면을 만들어주는 장면이다. 왕비의 충동이 낳은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를 가두려고 다이달로스는 다시 미궁을 만든다. ‘충동의 화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억압하는’ 구조물을 고안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예술학을 공부한 저자는 서문에 “박물관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론 따위를 제시하려는 책은 전혀 아니다”라고 썼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물관을 ‘완고한 환영이 교활한 방식으로 삶의 진실과 비루함을 은폐하는 공간’으로 본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를 “모든 건축물이 공백을 가두는 구조로 돼 있다”는 라캉의 말에 연결한다.

인류가 넘치는 충동을 ‘테두리 친 공백’의 형태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구조가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박물관은 위협적인 충동을 공백의 형태로 길들여 가둔 거대한 미로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술, 역사, 인간의 진리를 만난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도록 길들여진다. 길들여짐을 거부하는 선택은 가능하다. 박물관에 포획된 예술 작품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사로잡힌 공백을 해방시키는 길이 존재한다. 진정한 불행은 타자의 힘에 의해 반복되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난파나 조난이 아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라깡의 루브르#백상현#충동의 괴물#미노타우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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