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장제스 대만 패주때 가져온 황금 85t 일부 黨이 빼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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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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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차이잉원, 국민당 재산 몰수 추진… 어떤 돈이길래?

공산당 군대와의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한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1949년 1월 난징(南京)에서 패장(敗將)으로서 책임을 지고 하야한 뒤 저장(浙江) 성 시커우(溪口)로 낙향한다. 그해 5월 끝내 대만으로 밀려나기 전까지 장 전 총통이 리중런(李宗仁) 총통 대행 등으로부터 수차례 반환 압력과 신변 위협까지 느끼면서도 끝까지 지켜 낸 것이 대만으로 미리 빼돌린 황금이었다. 이 황금은 장제스와 국민당이 대만에서 다시 일어서 장기 집권을 하는 데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올해 1월 선거에서 총통과 의회 권력을 동시에 장악한 대만 민주진보당은 67년 전 대륙에서 반출된 황금의 일부 등이 흘러들어간 국민당의 재산 몰수에 나섰다. 민진당은 천수이볜(陳水扁) 정권(2000∼2008년) 시절에도 국민당 자산 몰수를 추진했으나 의회 장악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에는 총통은 물론 입법원 과반 의석까지 확보해 국민당 자산 국유화 등을 포함한 정당법 개정안과 ‘부당 당산(黨産·당 재산) 조례’ 제정 등을 통해 관철할 방침이다.

국민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국민당 재산 몰수’는 5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취임 이후 최대 현안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민진당이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민당 재산은 과거 국민당이 당고(黨庫)로 귀속시킨 일본 재산과 독재 정권 시절 수탈해 축적한 것 등이다. 여기에 1940년대 말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패주해 오면서 가져온 황금도 일부 포함됐다는 것이다.

국민당은 그동안 검찰과 정부가 문제 삼은 당 자산에 대해 지난해 10월 증여 또는 반납 형식으로 모두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국민당은 “특정 정당을 겨냥한 당 재산 추징 법안에 반대한다”며 “당료 퇴직금과 부동산 처리 비용 등을 제외한 남은 돈은 모두 국가와 사회공익단체에 기부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국민당은 최근에는 입법원에 ‘지도자 부당 재산 조사 처리안’을 제출해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이후 모든 지도자에 대해 취임 6개월 전부터 퇴임 6개월 후까지 모든 재산 실태 및 변동 상황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공에 나섰다.

이 처리안을 주도하고 있는 국민당의 린더푸(林德福) 입법원 원내단체 서기장은 “차이 주석 가족의 투자 중에도 의심을 받고 있는 것들이 있다”며 “외부의 감시를 받아야 하며 거부할 경우 정치 투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당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도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민진당 등에서는 국민당 재산이 1000억 대만달러(약 3조58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린유셴(林佑賢) 행정관리위원장은 16일 중앙상무위원회에 출석해 2015년 말 현재 국민당 재산은 166억 대만달러(약 5940억 원)라고 보고했다. 그에 따르면 국민당의 재산은 1998년 981억 대만달러에 이르렀으나 2000년 808억 대만달러로 줄어든 뒤 2005년 311억 대만달러로 대폭 감소했다는 것이다.

린 위원장은 “국민당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오면서 당시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227만 냥(약 85t)의 황금도 함께 대만으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정부의 추정치인 금 227만 냥은 현 시가로 약 10억 달러(약 1조1747억 원)에 이른다.

이 같은 논란 과정에서 장제스와 국민당이 1949년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패주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당시에 옮긴 황금과 문화재 등에도 눈길이 쏠린다.

국민당 정부의 ‘비밀 황금 운송 작전’은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 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12월 2일 오전 1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하이(上海) 와이탄(外灘)의 ‘중국은행’ 부두에 정박해 있던 화물선 하이싱(海星)호의 선원들은 전날 오후 2시 ‘최고 기밀 임무’가 있으니 전원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선원들은 무슨 화물인지 몰랐다. 이어 어둠 속에서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든 군과 경찰의 경비 속에 짐꾼들이 나무 상자를 은행에서 화물선으로 옮겨 실었다.

배가 저장 성 앞바다의 저우산(舟山) 군도에 도달했을 때 중푸린(鍾福林) 선장은 “이 배는 대만으로 간다. 화물은 국고에 있던 황금”이라고 공개했다. 이날 하이싱호가 반출한 황금은 1948년 말까지 중앙은행에 남아 있던 400여만 냥 중 절반인 200만 냥가량이다. 하이싱호는 이듬해 1월 1일에도 60만 냥을 다시 실어냈다.

그해 1월 20일 해군 함정 하이핑(海平) 쿤룬(昆侖) 메이펑(美朋) 어메이(峨眉)호 등도 약 90만 냥의 황금과 다량의 은을 대만으로 실어 날랐다. 중앙은행에 남아 있던 황금은 민간에서 반강제로 사들이거나 미국이 원조로 제공한 600만 냥의 황금 중 일부였다.

국민당 정부는 황금을 대륙에서 반출한 뒤 금과 화폐의 태환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하이 은행 앞에는 금을 바꾸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심지어 압사 사고가 발생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다. 당시 정확히 얼마만큼의 황금이 반출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국민당이 실어 나른 재산은 황금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의 문물(文物·문화재 등 문화의 산물)과 자료, 서화도 있었다.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는 결정적 고비가 된 ‘국공 3대 회전(會戰)’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10일. 베이징 소재 웡원하오(翁文灝) 국민당 정부 행정원장의 관저에서는 국립고궁박물원 국립중앙박물원 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 중앙도서관 등 4대 기관의 원장 등이 모여 주요 자료와 문물의 이전을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문물을 옮기는 장소에 대해 내전 중에는 대륙의 어느 지방에 가도 공산군의 추적을 당할 것이라며 대만으로 옮기자는 장푸충(蔣復聰) 중앙도서관장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했다. 행정원장과 장제스도 동의했다.

대만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1966년 문을 연 고궁박물원에는 베이징 고궁(쯔진청) 등 대륙 각지에서 반출한 문물과 서화 등이 전시돼 있다. 동아일보DB
대만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1966년 문을 연 고궁박물원에는 베이징 고궁(쯔진청) 등 대륙 각지에서 반출한 문물과 서화 등이 전시돼 있다. 동아일보DB
그해 12월 4일 중앙박물원이 먼저 120상자, 고궁박물원이 600상자 분량의 자료와 문물을 엄선하는 등 선별 작업을 거쳐 운송 작전이 시작됐다. 내전 상황이 급박해져 해상 운송은 3차례 이뤄졌다.

1차 운송은 1948년 12월 22일 해군의 중딩룬(中鼎輪)함이 장쑤(江蘇) 성 난징의 항구를 출발하면서 시작됐다.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육로를 통해 옮겨진 고궁박물원의 문물 320상자 3409건 등 700여 상자가 배에 실렸다. 군함에는 이미 내전을 피해 피란 가려는 해군 가족들이 갑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 유물을 싣기 위해 모두 쫓겨났다.

이듬해 1월 6일에는 전황 악화로 해군 군함을 동원할 여유가 없어 상선 하이후룬(海호輪)호를 임차해 3500여 상자를 날랐다.

문물의 3차 수송은 장제스도 하야를 선언하고 난징을 떠난(1949년 1월 21일) 이후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3000t급 군함 쿤룬(崑崙)함이 1월 28일 난징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24시간 동안 철야 작업을 통해 선적 작업이 진행됐다. 당시에는 전세가 극히 불리해 해군사령부의 가족들이 군함에 피란민으로 탑승한 뒤 ‘대성통곡’을 하며 “살려 달라”고 절규했다. 1차 운송 때처럼 배 밖으로 내보내지 못해 문물 적재 공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대만 푸런(輔仁)대 역사학과 린퉁파(林桶法) 교수는 저서 ‘1949년 대철퇴(大撤退)’에서 “대만 이전을 위해 난징에 옮겨 놓은 문물의 10분의 1가량만 대만으로 가져왔으나 중요 문물은 대부분 옮겨졌다”고 평가했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는 은허 시대의 출토품과 송·원·명·청 4대 왕조를 거쳐 내려온 도자기 서화 책자 등 75만 건의 문물이 보존돼 있다. 미국은 당시 “군함을 피란민보다 유물을 운송하는 데 사용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국보(國寶)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900여명 탑승 여객선 침몰로 38명만 구조돼… 군인들, 배표 없는 피란민 바다에 빠뜨리기도▼

1949년 국민당 ‘대륙 엑소더스’ 비극의 역사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군대가 공산당과 홍군에 패주하면서 정부와 당, 군인 및 가족 등의 ‘대륙 엑소더스’가 이뤄지고 ‘대만 피란’이 홍수처럼 이뤄졌다. 1956년 호구조사에 따르면 1946∼48년 15만9841명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동했으나 1949년에는 한 해에만 30만3707명이 본토를 탈출했다.

국민당 정부가 행정원을 대만으로 이전한 뒤인 1950∼52년 10만4663명이 추가로 대만으로 건너왔다. 1953년 현재 일반인과 군인을 합쳐 외부에서 온 외성인(外省人)은 약120만 명으로 전체 인구 800만 명의 15%가량을 차지했다. 이 비중은 지금까지도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만 학자들은 장제스가 ‘대륙 수복’을 기약하며 근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 △대륙에서 공산당 세력이 확산되고 있으나 대만에는 공산당의 침투가 거의 없었고 △물자가 풍부해 경제적인 독립에 유리하며 △대만해협이 가로막아 해군 공군이 없는 공산군대를 방어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등을 꼽는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등 측근들은 미국 영국이 해양 국가로 대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어 태평양 건너의 미국 영국과 친구 관계를 맺으면 외교적으로 유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미국의 원동(遠東) 방어선과 닿아 있는 것도 미국의 지원을 얻는 조건이 됐다.

하지만 민족의 대이주에는 희생과 대가가 따랐다. 900명 이상이 탑승했다가 침몰해 대부분이 숨진 비극적인 타이핑룬(太平輪)호 침몰 사건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 최대 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1949년 1월 27일 타이핑룬호에는 피란민과 상인 군인 및 가족 등이 배를 가득 채우고 상하이 항구를 출발했다.

밤 11시 반경 저우산 군도 부근에 왔을 때 지룽에서 상하이로 오던 석탄 및 목재 운반선 젠위안룬(建元輪)과 충돌했다. 처음에는 소형 선박인 젠위안룬만이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30여 명은 구조됐지만 70여 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핑룬호 선체에도 구멍이 뚫려 배에 물이 들어오고 과적으로 배가 기울고 있는 사실이 발견됐다. 타이핑룬호가 침몰한 것은 처음 충돌 후 1시간가량 지난 뒤였다. 선박이 부서진 것을 뒤늦게 알아 구조 요청이 늦어지는 바람에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탑승자는 표를 구입한 승객 508명, 선원 124명,표 없이 탄 사람 약 300명 등 900여 명이었는데 인근을 지나던 호주 군함에 구출된 사람은 38명에 불과했다. 이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대만 지룽 항 ‘동 16호 부두’에는 ‘타이핑룬 위난 여객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사고 이후 1949년 5월 중순 상하이가 공산군에 점령된 후에는 피란이 절정을 이뤘다. 부두에서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무단으로 배에 오르다 상하이 황푸 강에 빠져 숨지기도 하는 등 생지옥이 연출됐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다. 심지어 군인이 배에 오르려는 사람을 구타해 바다에 빠뜨리기도 했다.

1949년 상하이의 물가는 전황이 모호하던 2년 전에 비해 천정부지로 치솟아 뱃삯은 상하이∼지룽의 경우 1946년 7월 8400프랑에서 1949년 1월에는 32만 프랑으로 38배가 올랐다. 상하이에는 온 가족이 피란을 떠나 빈집이 즐비하고, 자동차와 집기 고서화 등이 버려져 길에 가득 쌓여 있기도 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대만 장제스#차이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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