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의 음악상담실]<1>동물원의 ‘혜화동’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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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매주 토요일 ‘음악상담실’을 연재합니다. 인기 그룹 ‘동물원’의 멤버였던 김 씨는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널 사랑하겠어’ ‘혜화동’ 등을 만들었습니다. 》
요즘 1988년을 추억하는 드라마에서 제가 만들고 부른 ‘혜화동’이란 노래가 나와 죽었던 고목에 꽃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룹 동물원 2집에 실려 있던 곡으로, 당시 엉거주춤한 히트곡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혜화동 언덕 꼭대기 작은 한옥에서 자랐습니다. 1960, 70년대 서울의 어느 마을에나 있던 방범초소는 우리 친구들의 ‘본부’였고, 콘크리트로 찍어낸 공동 쓰레기통은 우리들의 ‘아폴로 11호’였습니다. 우린 그 쓰레기통 위에 앉아 코를 훌쩍거리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웠죠.

골목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다가 배가 고프면 담벼락 너머로 삐져나와 있는 대추나무나 감나무에 고무신을 던져 군것질거리를 마련했습니다. 공책 살 돈으로 번데기를 사 먹고, 저금통에서 몰래 뺀 동전으로 눈깔사탕을 사 먹기도 했죠. 한 입씩 빨고 다음 아이에게 줘야 했지만 저는 당연히 사탕을 입에 물고 냅다 도망치곤 했습니다.

‘혜화동’이란 노래는 1988년 봄, 동물원이 한창 인기를 누릴 때 만들어졌습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던 어느 날, 저는 오랜만에 고향 같은 혜화동의 ‘우리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골목길은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죠.

어릴 적 친구들이 그리워졌습니다. 담 넘어간 축구공을 찾으려고 “공 좀 꺼내주세요”라고 외치던, 동네 형들에게 얻어맞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형들이 보여준 빨간책의 내용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며 자랐던 그 녀석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죠. 전화를 걸어 동네 골목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상상을 했습니다. ‘우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아가는지’ 하는 노래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기억은 왜곡되어 저장됩니다. 더 우세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덜 중요한 정보는 변경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기억은 회상될 때 여러 번 더 변형됩니다. 논리와 도식, 고정관념의 틀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죠. 신경증적인 동기적 망각과 왜곡도 끼어듭니다. 부모에 대한 과도한 분노같이 현실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감정은 희석되고 왜곡되어야 정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은 정말 아름다운 시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즐거웠던 유년 시절, 보람되었던 입시생 시절, 군대스리가, 뜨거웠던 사랑이 사실은 많은 부분 왜곡된 기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곡이면 어떻습니까? 그 추억들이 고달픈 우리의 ‘솔 푸드’인 것을, 삶이 고달프고 퍽퍽한 것을 알고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우리의 뇌가 고맙게 왜곡시켜준 결과인 것을.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동물원#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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