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허무니 무엇이 보이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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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허산 개인전 ‘벽을 깨다’

허산의 ‘Forgotten’(왼쪽 사진). 전시실 콘크리트 벽을 곡괭이로 두들겨 파내고 그 틈새에 단지를 박아 넣은 것처럼 보인다. 두들겨 파낸 흔적과 파편은 작품의 일부일 뿐. ‘벽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숨은 고갱이다. 오른쪽 사진 ‘부서진 기둥’도 마찬가지다. 진짜 기둥은, 과연 있을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허산의 ‘Forgotten’(왼쪽 사진). 전시실 콘크리트 벽을 곡괭이로 두들겨 파내고 그 틈새에 단지를 박아 넣은 것처럼 보인다. 두들겨 파낸 흔적과 파편은 작품의 일부일 뿐. ‘벽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숨은 고갱이다. 오른쪽 사진 ‘부서진 기둥’도 마찬가지다. 진짜 기둥은, 과연 있을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응? 이게 뭐야. 텅텅 비었네. 전시 안 해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주&선화갤러리. 입구에 들어선 50대 여성 관람객이 당황한 듯 직원에게 물었다.

“하는 중입니다. 숨어 있는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 이번 전시 주제입니다.”

어리둥절해하던 여성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발길을 돌렸다. 9월 25일까지 열리는 조각가 허산 씨(35) 개인전 ‘벽을 깨다’를 찾은 관람객이 흔히 보이는 반응이다.

당연히 그럴 만하다. 입구에서 언뜻 시야에 들어오는 건 300m² 넓이의 직사각형 전시실 복판에 덩그러니 일렬로 선 폭 25cm, 높이 2.8m의 정사각 기둥 세 개다. 그중 제일 왼쪽 것 하나가 천장과 바닥으로부터 각각 60cm 지점에서 분질러진 듯 비스듬히 꺾여 돌출돼 있다.

이 셋이 묶여 ‘부서진 기둥’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구성한다. 처음 사진자료를 받아본 뒤 ‘하중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이게 설치작품이라면 전시가 끝난 뒤 치우기가 너무 어렵지 않을지’ 의문이 들었다. 실물을 한동안 살펴보고 나서야, 깨끗이 속았음을 알았다.

이 갤러리는 24층 높이의 태광그룹 흥국생명 빌딩 3층에 있다. 철골구조 고층 건물에서 300m² 사각형 공간 복판에 보조 기둥을 세 개나 둬야 한다면 구조설계에 문제가 있는 거다. 원래 이 세 기둥은 없었다. 받아내야 하는 수직하중도 물론 없다. 이 셋은 나무 합판을 짜 맞춰 기둥 모양으로 만든 설치물이다. 콘크리트는 분질러진 듯 보이는 지점에만 쓰였다. 합판과 콘크리트 덩어리를 붙인 뒤 표면에 흰색 도료를 발라 이음매를 감춘 것이다.

허 씨는 영국 런던대를 졸업한 뒤 그곳에 머물며 이와 비슷한 공간설치작품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2011년에는 글로스터셔 주의 한 건물 출입구 돌출슬래브 지붕에 가짜 기둥 네 개를 붙이고 하나를 ‘분질러’ 놓았다. 설치작품인 줄 모르는 방문객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실 벽에는 제목 그대로 ‘깨진’ 곳이 몇 군데 있다. 곡괭이로 세차게 한참을 내려친 듯 깊숙이 파인 틈바구니 안으로 콘크리트에 파묻혀 굳은 모양새의 도기 귀퉁이가 화석처럼 삐죽 드러나 있다. 벽을 파내다 우연히 발굴된 듯하지만 이 도기는 그렇게 보이게끔 연출해서 묻은 설치연작 ‘Forgotten’이다. 희게 칠한 전시실 벽 태반은 나무 합판으로 만든 가짜 벽이다. 콘크리트는 깨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에만 썼다.

허 씨의 실험적 설치작품이 일관되게 두들겨 캐묻는 건 우연과 의도, 자연과 인공의 경계다. ‘깨진 벽’ 앞에는 콘크리트 잔해가 의뭉스럽게 흩뿌려져 있다. 벽에서 깨져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하나하나 세심히 만들어 적절한 위치를 고민하고 늘어놓은 파편 더미다. 한쪽 벽은 널찍하게 뚫어내고 그 안쪽 공간에 흙을 쌓아 갖가지 나무를 심어놓았다. 벽 너머로 밟는 숲과 흙은 얼마만큼의 ‘자연’일까. 전시실 하나가 통째로, 허허로움과 흥미로움의 경계 어딘가를 부유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조각가#허산#벽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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