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노래 아리랑 뿌리찾아 시베리아로 간 ‘꽃보다 할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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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이정면 美유타대 명예교수-88세 서무송 한국동굴학회 고문

아리랑 사랑에 푹 빠진 50년 지기, 연해주~바이칼호 3000km 답사
“아리랑은 한민족이 부른 大서사시…9월 중앙亞서 2차 루트 밟을 계획”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뿌리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3000km를 답사한 이창식 전 우리은행 부행장과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 서무송 한국동굴학회 고문(왼쪽부터). 이들은 “바이칼 호 인근에서 만난 부랴트족이 아리랑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뿌리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3000km를 답사한 이창식 전 우리은행 부행장과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 서무송 한국동굴학회 고문(왼쪽부터). 이들은 “바이칼 호 인근에서 만난 부랴트족이 아리랑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난해 한 여행사에 연락이 왔다. 당시 89세, 87세 두 노(老)학자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까지 6000km의 학술 답사를 하겠다는 것. 여행사는 “연세 때문에 한 달가량의 긴 여정을 소화할 수 없어 곤란하다”고 답했다. 고령이라 여행자보험 가입도 안 됐다.

하지만 두 학자는 가고 싶었다. 지병인 고혈압이 있는 한 사람은 유서까지 남겼다. 일정을 절반인 2주로 줄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3000km만 답사하기로 했다. 이들의 목적은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뿌리를 찾는 것. 1937년 소련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이 아리랑을 부르며 한(恨)을 달랜 흔적을 더듬고 한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를 방문하는 계획이었다. 2014년 9월 16일 두 사람은 드디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책 ‘누이야, 시베리아에 가봐’(이지출판)로 최근 출간됐다.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출연진보다 족히 열 살은 더 많은 두 학자의 여정이 책에 담겼다.

바이칼 호 앞에 선 이정면 교수, 이창식 전 부행장, 서무송 고문(왼쪽부터). 이지출판사 제공
바이칼 호 앞에 선 이정면 교수, 이창식 전 부행장, 서무송 고문(왼쪽부터). 이지출판사 제공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90)와 서무송 한국동굴학회 고문(88)은 “정정해 보인다”는 말에 “시베리아 정기를 받아 그렇다”며 웃었다. 이들의 답사에 동참한 ‘겨우’ 환갑의 이창식 전 우리은행 부행장도 함께했다.

서울대를 나온 이 교수는 한국인 지리학 박사 1호(미국 미시간대), 김일성종합대의 전신인 평양종합대를 나온 서 고문은 지리학 중에서도 동굴 전문가다.

지리학자들이 왜 아리랑일까? 이 교수는 “1972∼2004년 미국에서 지내며 고국이 그리울 때면 늘 아리랑을 불렀다”며 “가슴을 울린 그 노래의 본고장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2007년 정선과 밀양, 진도의 아리랑 유적을 답사해 영문서 ‘아리랑―한국의 노래(Arirang―Song of Korea)’를 펴내기도 했다.

50년 지기인 이 교수의 아리랑 사랑에 함께 빠져든 서 고문은 “아리랑 연구는 민요 한 분야뿐만 아니라 지리 민속 심리 문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등을 거치며 고려인의 아리랑을 듣고 흔적을 더듬었다. “고려인들을 인터뷰해 보니 그들의 삶 자체가 아리랑이었다. 소수민족으로서 핍박을 견뎌온 그들을 우리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이 교수)

바이칼 호 인근에서 만난 부랴트족은 아리랑을 알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몽골 학자도 아리랑을 들려주자 “이 노래는 북방의 기원을 가진 노래”라고 했다. “아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한민족이 시베리아 북방에서 한반도로 이동하며 불렀던 대서사시라는 점을 느꼈다.”(서 고문)

여행 중 재밌는 일화도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남자들이 술, 담배를 즐겨 칠십을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다. 두 학자의 나이를 들은 현지인들은 “곱게 나이 드신 정기를 받고 싶다”며 서로 껴안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이들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9월 초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2차 ‘아리랑 루트’를 밟을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백팩을 메고 야구 모자를 쓰며 이 교수가 말했다. “그곳에 가보니 우리 민족의 원형이 있었다. 우리 민족이 강인하고 용맹하면서도 섬세하다는 걸 알게 됐다. 궁금한 게 많으니 끝까지 가 보련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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