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컵 국제요트대회]첫 요트경기는 英 찰스 2세와 요크 공작의 내기 경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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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의 역사

요트 역사에서는 배보다 돛이 더 중요하다.

고대 사회에서부터 배를 움직일 때는 노와 돛을 동시에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3400년경 이집트 벽화에 횡범(橫帆)과 노를 함께 쓴 범선이 나오는 걸 토대로 요트가 나일 강 유역에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그 뒤 배는 문명 발달과 함께 범선으로 발전해 왔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종범(縱汎)은 15세기경 오리엔트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7세기 중엽에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식민지 경쟁을 하면서 대형 범선을 정책적으로 건조했으며 1720년에는 역사상 최초의 요트 클럽 ‘코크하버’가 창립됐다.

이후 동·서인도 제도와 서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에 따른 대항해 시대가 되면서 범선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산업혁명 후 증기기관과 엔진이 발명되면서 교통수단으로서의 범선은 쇠퇴했다.

대신 요트 경기가 등장했다. 영국 왕 찰스 2세가 시초다. 네덜란드에 망명해 있던 그는 망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요트 한 척을 선물 받았다. 찰스 2세는 영국으로 건너가 비슷한 배를 몇 척 더 건조해 본격적인 경기를 시작했다.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요트 경기는 1661년 찰스 2세와 요크 공작이 100파운드를 걸고 한 경기다. 이후 찰스 2세는 여러 요트 클럽과 공식 경기를 치렀다. 1747년에 경기규칙이 생겼고, 1775년에는 대규모 요트 대회가 열렸다.

그러다 메이플라워호가 대서양을 건너면서 미국 동해안에 요트가 전파됐다. 1844년에 미국 뉴욕에 요트 클럽이 생겼고, 1851년에는 거꾸로 대서양을 건너간 아메리카호가 영국의 와이트 섬 일주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우승함으로써 미국이 요트 강국으로 등장했다.

20세기 들어 요트는 완전한 스포츠 및 레저로 자리 잡았다. 현재 주요 요트 대회로는 매치 레이스인 아메리카스컵, 대양을 횡단하는 오션 레이스, 올림픽과 아시아경기의 딩기 레이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주말이나 휴일에 심신 단련 목적으로 크루징 세일링을 즐기는 동호인도 많다.

한국 역시 범선 역사는 오래됐지만 서구와 같은 개념의 요트는 찾아볼 수 없다. 국내에서는 1930년경 연희전문학교의 언더우드가 ‘황해 요트클럽’이라는 이름으로 한강 하류에서 활동한 것을 요트의 효시로 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요트 금지령을 내렸지만 광복 이후 미군들이 다시 요트를 타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개인적으로 요트를 만들어 타는 한국 사람들이 등장했다.

본격적으로 요트가 보급된 건 1970년 몇몇 동호인들이 한강변 광나루에 호수용 ‘턴 클래스’ 20척을 합판으로 만들어 대한요트클럽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이 클럽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활기를 띠었지만, 1972년 대홍수로 배가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이 클럽 동호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힘을 모아 국제 스나이프 클래스와 국제 오케이 딩기 클래스를 제작해 1974년 4월 대한조정협회에 요트부를 신설하고 요트 경기 보급에 나섰다. 1979년 3월 17일 대한요트협회가 창립됐고, 대한체육회와 국제요트연맹에도 가입하게 됐다.

한국 대표팀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에 처음 출전하였으며 1984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림픽 데뷔전을 치렀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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