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글로벌 북 카페]敵을 찬미한 에코… 도발적 메시지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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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에세이집 ‘적을 만들어라’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 사진 출처 라 레퓌블리크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 사진 출처 라 레퓌블리크
이탈리아 출신의 기호학자이자 중세연구가이며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에세이집 ‘적을 만들어라’(그라셋)가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이 책에는 율리시스부터 위키리크스까지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경쾌하게 쓴 에코의 에세이가 묶여 있다.

책은 에코가 수년 전 미국 뉴욕에서 한 택시운전사와 만난 일화로 시작한다. 파키스탄 출신의 택시운전사는 에코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말에 “그럼 당신 나라의 적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가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택시운전사는 당신 나라와 역사적으로 영토분쟁을 하거나, 국경에서 전쟁을 하거나,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죽였던 나라는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에코는 “반세기 전에 마지막 전쟁(2차 세계대전)을 마친 후에는 전쟁을 한 적이 없으며, 지금은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택시운전사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사람이나 국가가 적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따졌다. 에코는 “이탈리아의 게으른 평화주의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 2달러의 팁을 더 주고 내렸다”고 회상했다.

에코는 그날 이후로 자주 이 질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2008년 5월 이탈리아 볼로냐대에서 ‘적을 만드는 것’에 대한 주제를 갖고 강의를 했다. 에코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사실 이탈리아에 적이 없던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다. 외부에 적이 없었을 뿐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무수한 적이 싸우고 있었다. 북부와 남부의 경제갈등, 파시스트와 빨치산, 마피아와 국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사법부….

에코는 고대 로마에서부터 중세, 근대, 현대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며 ‘적을 만든다’는 개념을 성찰한다. 그는 최근 프랑스 아르테 TV에 출연해 “중세의 마녀부터 유대인, 이방인, 흑인, 동성애자, 범죄자, 매춘부, 오사마 빈 라덴까지 적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며 “지금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새로운 국제적 공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에코는 심지어 “적이 없다면, 적을 만들라”라고 말한다. 자칫 파시스트의 철학으로 오인될 수 있는 도발이다. 그러나 에코가 말하는 적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필요한 존재다. 우리는 ‘타자’의 관점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적은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 도덕과 부도덕, 아름다움과 추함을 깨닫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개인은 괴물과 싸움을 통해 성숙한 영웅이 된다.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도 자아(ego)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림자(Shadow)’로 불리는 이 부분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자아를 성숙하게 하는 동맹 같은 존재다. 한반도 주변에도 가까이 살기엔 버거운 이웃(또는 적)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성숙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닐까.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움베르토 에코#적을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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