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 복식부기 장부 14권 발굴… “조선말 자본주의式 경영 입증할 세계적 자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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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북한 사회과학원이 소장한 1786년 개성상인 부채장부의 한 쪽. 위쪽 문서와 같은 형식으로 세모꼴 기호 밑에 주인의 이름과 채권자들의 이름, 자기자본과 타인자본 명세가 세로쓰기로 나란히 씌어 있다. 전성호 교수 제공
아래 사진은 북한 사회과학원이 소장한 1786년 개성상인 부채장부의 한 쪽. 위쪽 문서와 같은 형식으로 세모꼴 기호 밑에 주인의 이름과 채권자들의 이름, 자기자본과 타인자본 명세가 세로쓰기로 나란히 씌어 있다. 전성호 교수 제공
개성상인 후손 박영진 씨 가문의 회계장부 14권은 개성상인들이 이미 19세기에 현대식 복식부기를 사용했음을 뚜렷이 입증한다. 개성상인이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는 고유의 복식부기를 사용했음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를 입증하는 완벽한 현대식 복식부기 장부가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분개장부터 총계정원장,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투자자에 대한 이익배당 기록까지 회계의 모든 과정을 복식부기로 작성하는 것은 20세기 들어와 모든 기업에서 일반화됐다. 박 씨 가문의 회계장부는 현대식 복식부기로 작성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실무회계기록이란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복식부기의 발상지로 알려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도 13세기부터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기록은 있지만 대부분 파편화된 낱장으로 남아있어 기업경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진 못했다.

이 자료를 연구한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박 씨 가문의 회계장부에 기록된 약 30만 건의 거래기록을 조목조목 살펴보니 현대식 복식부기로, 한 치의 오차 없이 투명하게 기록돼 있어 현대 경영의 기준으로 봐도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일례로 박 씨 가문의 1887년 부채장부(타급장책·他給長冊)에는 주인이 최초로 투자한 자기자본과 남에게 빌린 타인자본이 세로쓰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문서 상단의 지붕모양 기호들 밑에 주인집 이름인 발곡택(鉢谷宅)과 함께 채권자들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문서 곳곳에 보이는 내(內) 자와 입(入) 자가 각각 복식부기의 차변과 대변에 해당한다.

박 씨 가문의 자료보다 100년 앞선 1786년에 복식부기 방식으로 기록된 또 다른 개성상인의 부채장부도 개성상인의 앞선 회계방식을 입증한다. 북한 학자 홍희유가 1962년 논문에서 이 자료를 언급한 적이 있지만 실체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전 교수 연구팀은 이 부채장부를 포함해 1786∼1947년 북한 개성상인의 회계장부 23권의 사진 파일을 확보했다.

복식부기는 ‘회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카 파촐리가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쓰던 복식부기를 ‘산술·기하·비율 및 비례 총람’(1494년)이라는 책에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복식부기는 서구 자본주의와 합리주의의 발전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았고, 괴테는 복식부기를 ‘인류의 지혜가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의 하나’로 꼽았다.

중세의 복식부기는 기업의 상업활동과 금융활동만을 차변과 대변으로 나눠 기록했다. 현대식 복식부기는 상업활동, 금융활동과 더불어 기업활동, 즉 외부 공개를 목적으로 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내부 보고를 목적으로 한 원가관리회계를 포함한다.

일찍이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현병주가 ‘사개송도치부법’(1916년)이란 저서를 통해 개성상인이 베네치아 상인보다 200년 앞서 세계 최초로 복식부기를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회계학자 윤근호도 논문 ‘사개송도치부법 연구’(1970년)에서 개성상인이 고려 초부터 복식부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증자료는 없이 고려시대 ‘상서도관첩’(1262년)에 쓰인 회계용어와 개성상인 회계장부에 쓰인 용어가 일치한다는 점만 근거로 추정되어 왔다.

송상(松商)으로 불린 개성상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성을 중심으로 국내 상업은 물론 국제교역을 이끌었다. 개성상인의 합리적인 경영과 수완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아모레퍼시픽, OCI(동양제철화학), 에이스침대, 삼립식품 등 많은 기업의 뿌리가 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3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조선시대 개성 복식부기의 세계 회계사적 의의: 유럽 중국 일본과의 비교 연구’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이 사료들의 국제적 가치를 평가받는다. 제임스 루이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나니 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중국학연구소 연구원, 서용달 일본 모모야마대 명예교수, 미요카와 마사히데 일본 다쿠쇼쿠대 부총장도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벌인다.

:: 복식부기(複式簿記)란? ::


회계장부를 작성할 때 모든 거래를 좌측 차변(借邊)과 우측 대변(貸邊)에 각각 기입하여 두 번 기입하는 방식. 재산 구성 부분의 변동만을 기록하는 단식부기와 달리 재산의 이동과 손익계산의 상세한 내용을 표시할 수 있다. 단식부기가 소기업과 가계, 또는 손익 산출이 필요 없는 관청에 쓰인다면, 복식부기는 거래 활동이 복잡하고 정확한 거래 업적을 산출해야 하는 기업에서 쓰인다. 13, 14세기 중세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학계에선 고려 전성기(11∼13세기 초) 개성 상인들이 같은 원리로 작성했던 ‘개성부기’가 더 앞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개성상인#복식부기#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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