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Harmony]칠기장인 최종관 씨 가족의 ‘옻칠작업 세대공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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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공예, 현대적으로 거듭나듯… 代이어 갈 겁니다
일본 공예가들 길면 15대까지 아들에게 기술 전수
우리도 ‘공예 가문’ 나와야 한다 생각하고 실천 결심
아들 민우씨 네살 때부터 미술학원 보내

전통옻칠 공예가인 최종관 씨 가족이 11일 작업장이자 갤러리인 서울 마포구 동교동 ‘채화칠공예연구소’ 1층에 모였다. 매화무늬 관복함(왼쪽 아래)과 당초문 혼수함(오른쪽 아래) 등 전시된 작품은 이들 가족 4명이 함께 땀흘려 만든 채화칠기 작품들이다. 대를 이어 오랫동안 ‘옻칠가족’으로 남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왼쪽부터 딸 다영 씨, 최 씨, 부인 김경자 씨, 아들 민우 씨.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전통옻칠 공예가인 최종관 씨 가족이 11일 작업장이자 갤러리인 서울 마포구 동교동 ‘채화칠공예연구소’ 1층에 모였다. 매화무늬 관복함(왼쪽 아래)과 당초문 혼수함(오른쪽 아래) 등 전시된 작품은 이들 가족 4명이 함께 땀흘려 만든 채화칠기 작품들이다. 대를 이어 오랫동안 ‘옻칠가족’으로 남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왼쪽부터 딸 다영 씨, 최 씨, 부인 김경자 씨, 아들 민우 씨.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말 그대로 새까만 칠흑(漆黑) 위에 온갖 색상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을 띤 연초록 학은 천 년 전 고려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것처럼 옻칠 위를 날고 있다. 황금색 백매화도, 붉은색 눈꽃무늬도 칠흑이라는 ‘무대’ 위의 기품 있는 배우였다. 천 년을 이어온 한국의 채화칠기(彩畵漆器), 그중에서도 최종관 칠기장인(62)이 만들어 낸 공예 작품들이다.

최 장인은 운이 좋은 사나이다. 43년 동안 칠기장인 외길을 걸었고, 이제 국내외 전문가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의 채화칠기 대표 명인이 됐다. 정부가 인증한 채화칠기 기능전승자이기도 하지만 그가 운이 좋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최 장인이 만드는 칠기 공예품은 아내와 아들딸까지 온 가족이 함께 만드는 ‘공동 작품’이다. 자손에게 대대손손 전승하는 문화가 사라진 한국 공예 바닥에서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다.

“여보. 우리 애 낳으면 옻칠 시켜야겠어.”

1982년 갓 결혼해 아이가 생긴 최 장인은 부인 김경자 씨(54)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1970년 열아홉의 나이로 나전칠기 분야 중요무형문화재였던 고 김태희 선생 밑에서 입문해, 그의 표현대로 ‘장이’의 삶을 산 지 12년 지난 때였다.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장인에 대한 사회적 예우도 없던 1980년대 초반이었다.

부인은 화를 냈다. 김 씨는 “고생을 하고 싶으면 당신만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김 씨가 화를 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아들이라는데 결혼 못할까봐 걱정됐어요. 쌀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공예가들이 넘쳐나던 시기에 아들도 경제관념 없이 가난하게 생활하는 건 아닐까 싶었죠.”

그가 아들에게 공예를 전승시키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해 일본의 주요 공예 가문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후였다. 칠기 분야는 물론이고 옥공예, 금속공예 등 여러 곳을 둘러봤다. 그리고 느꼈던 것이 대를 이은 기술 전수의 필요성이었다.

“그때 돌아봤던 일본 공예가들은 짧으면 5대, 길면 15대 이상 아버지에서 아들로 기술을 전수하고 있더군요. 기반이 완전히 붕괴된 한국 공예도 다시 발전하려면 ‘월급 받는 직원’이 아니라 소명감을 지닌 ‘공예 가문’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식을 낳아 ‘사(士)자 들어간 직업’을 꿈꾸던 시대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 장인은 멀리 내다보고 채화칠기 대 잇기 작업에 들어갔다.

멀리 내다본 대 잇기

최종관 씨가 만든 눈꽃송이 삼층장. 검은색과 적갈색이 어우러진 바탕 위에 그려진 채화칠기의 특유의 화사한 꽃무늬가 도드라져 보인다. 최종관 씨 제공
최종관 씨가 만든 눈꽃송이 삼층장. 검은색과 적갈색이 어우러진 바탕 위에 그려진 채화칠기의 특유의 화사한 꽃무늬가 도드라져 보인다. 최종관 씨 제공
아들 민우 씨(30)가 네 살 되던 해부터 미술학원에 보냈다. 고사리 손에 크레파스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아들 모습을 보고도 마냥 흐뭇했다. 그 사이 부인 김 씨도 함께 옻칠 작업을 하게 됐다. 최 장인은 미대를 졸업한 부인이 옻칠을 해보려고 할 때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니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타박했다. 부인 김 씨는 ‘오기’로 몇 번 채화칠기 작업을 하다 결국 칠기 공예에 입문했다. 1996년 칠기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끝까지 못하게 말리니 오히려 더 해 보고 싶더라고요. 입문하고 보니 어려운 만큼 매력적인 일이라 더 몰입하게 됐어요.”

부모가 함께 옻칠 작업을 하니 ‘대 잇기 프로젝트’는 더 쉬워졌다. 민우 씨나 딸 다영 씨(23) 모두 어릴 때부터 공방에 살며 부모의 작업 모습을 지켜봤다.

채화칠기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6개월 동안 28번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옻을 칠하고 말리고 다시 칠하는 섬세한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오래 걸리는 작품은 제작에만 2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건조와 옻칠 작업 중 한 번만 실수해도 작품이 망가져 버린다. 최 장인은 “그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이들이 우리 뒤를 따라온 게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 “아내·아이들 저마다 개성 살리며 아름다운 예술창조, 정말 보람되죠”


‘비전 제시’로 설득

고비도 적지 않게 있었다. 민우 씨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아예 미술 쪽에 관심을 끊었다. 또래 학생들처럼 컴퓨터를 즐기던 민우 씨는 공방(工房)에 틀어박혀 나무에 옻칠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반복된 단순 작업에, 스승인 아버지의 호통을 계속 들어야 하는 도제식 교육이 싫었다. 고교 2학년 때 컴퓨터 관련 학과를 가겠다며 이과를 지망했을 때는 부모와 말다툼까지 벌였다.

“결국 제가 졌어요. 부모님한테 설득당했다고 할까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포기하고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걸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미대 입시를 위해 미술학원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죠.”

민우 씨는 배재대 칠예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통영옻칠미술관 학예사로도 일했고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 장인이 아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한 강압이 아니라 ‘비전 제시’를 통해 아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 최 장인은 “아들에게 일본이든 중국이든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을 전수하며, 국제적으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민우 씨는 “현대적인 감각을 옻칠공예에 접목한 작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며 “한국의 멋을 지키고 여기에 새로운 감각을 더해 국제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딸 다영 씨는 한국전통문화학교를 졸업하고 부모와 오빠의 뒤를 따라 가족 공방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가족 작업이지만 개성 살린다

최 장인의 가족 네 명은 2011년 서울 인사동에서 ‘채화칠기 가족전(展)’을 열었다. 나전칠기가 ‘대세’인 국내 칠기 분야에서 채화칠기전 자체가 드물 뿐더러 가족전은 처음이었다.

함께 작업하지만 가족들의 작품은 저마다 다르다. 아버지 최 장인은 천연광물안료를 이용해 운학문과 국화문, 매화문 등 한국의 전통적인 문양을 넣은 전통 칠기가구를 만들어냈다. 어머니 김 씨는 팔각 그릇이나 과반(果盤·과일 접시) 등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생활 칠기를 내놨다.

아들 민우 씨와 딸 다영 씨는 한글 디자인의 책장이나 스탠드 꽃병 등 파격적일 수 있는 소재와 작품을 선택했다. ‘같지만 다른’ 작업 방식이 가족 공예방을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최 장인은 “내가 만들면 비판을 받기 쉬운 현대적인 작품도 아들은 소화해 낼 수 있다”며 “저마다 개성을 살릴 수 있게 작업하면서 대를 이은 기술 전수도 가능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아들이 결혼해 또 자식을 낳으면 그때도 칠기 공예를 전수할까. 아들 민우 씨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가 하고 싶다고 하면 시킬 생각”이라며 “나도 아버지처럼 설득을 계속하는 방식의 ‘선택권’을 주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채화칠기는 일본식’ 오해 그만


온 가족이 채화칠기를 만드는 가족답게 이들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화칠기에 대해 설명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특히 화려한 채화칠기1가 ‘일본식 칠기’라는 오해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이들 가족이 작업하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채화칠공예연구소’ 1층의 갤러리에 들어서면 “화려하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익히 보아 온 칠기 가구들이지만, 조개껍데기를 넣은 나전칠기 대신 붉은색과 황금색, 녹색 등 다양한 색깔로 무늬를 그려 넣은 작품들이 가득하다.

최 장인은 “붉은색 무늬를 그려 넣은 칠기 작품을 보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일본식’이라고 오해한다”며 “내가 만드는 붉은색 교지함(敎旨函)도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했던 것을 재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궁중에서 사용하던 무늬와 색이라 일반에 널리 퍼지지 못했고, 이후 나전칠기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국내 칠공예의 주류가 나전칠기로 정착됐다는 설명이다.

실제 채화칠공예연구소 1층에는 서울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모양의 백제시대 채화칠기 복원본이 있다. 섬세한 무늬와 화려한 색상이 현대적 감각으로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통 예술을, 그것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되살린다는 게 정말 보람된 일이잖아요. 앞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가족들이 좀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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