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지식인’ 성호 이익 서거 250주년]<4> 성호학파의 확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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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수용 싸고 좌-우파 갈려 성호학의 양대기둥 발전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
“방에 들어가 선생께 절을 올리니, 일어나서 답례하기를 매우 공손히 하셨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통 사람보다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눈빛이 사람을 쏘아보았다.”(‘순암집’ 함장록)

1746년 학문에 대한 목마름으로 성호 이익(1681∼1763)을 찾은 순암 안정복(1712∼1791)은 성호의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순암은 젊은 손님을 대하는 성호의 공손한 모습에서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형형한 눈빛을 보았고, 이에 감동하여 학문 인생을 성호에게 믿고 의탁했다. 제자로 갓 입문한 순암이 받은 저녁상에는 그릇에 다 차지 않은 밥에 새우젓 한 접시와 나박김치가 전부였지만 성호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호는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는 방법을 설명했고, 이때 순암의 가슴에는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피어올랐다.

성호는 넓은 학문을 지닌 지성인 동시에 사람을 아량과 편안함으로 대하는 넉넉한 인품까지 갖추었다. 그리하여 작고 누추했던 그의 문전에 배움을 청하는 학인(學人)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경기 안산 첨성리는 한 시대가 주목하는 학술문화공간이 되었고, 성호의 집인 성호장(星湖莊)에 딸린 육영재(六楹齋)는 성호학파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순암을 비롯해 윤동규 이병휴 이용휴는 성호의 핵심 제자이자 차세대 성호학파를 이끈 주역들이다. 성호의 학문은 이 네 석학에 의해 큰 갈래가 잡혔고, 여기에 이맹휴 이구환 이중환의 지리학, 이가환의 서학과 수학 등이 보태지면서 국학 전반에 대한 시야도 넓어졌다. 성호학의 학풍은 신경준 정상기 신후담 남하행 황운대 정항령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호학파는 문인들 간의 치열한 성리(性理) 논쟁, 서학 및 양명학에 대한 입장 차이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고, 마침내 성호가 죽은 뒤에는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다.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순암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다. 흔히 전자는 성호우파, 후자는 성호좌파로 불린다.

성호우파는 순암을 중심으로 역사 언어 등 민족문화에 관심이 커 국학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신경준 신후담 정상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성호좌파는 권철신 이벽 권일신 이기양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이 주축이었는데, 이들은 천주교에 경도되어 서학 연구에 심취한 부류였다. 특히 정약용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어 18년의 유배생활을 감수하기도 했지만 실학 집대성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정약용의 다산학을 이해하려면 성호학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호학은 허전(1797∼1886)을 통해 영남 지역으로 확산됐다. 허전은 순암의 문인 황덕길의 제자였으므로 우파학통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허전은 1864년 김해부사로 부임하면서 영남과 연을 맺었고, 김해 등 낙동강 연안 지역을 대상으로 350명에 달하는 문인을 양성했다. 허전은 실심(實心·참된 마음)과 실정(實政·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을 강조하는 실용주의적 학문관과 경세관을 갖고 있었다.

허전에게는 이홍석(1838∼1897)이라는 수족 같은 애제자가 있었다. 경남 의령 출신인 이홍석은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고, 스승을 도와 성호학파의 현창(顯彰)에도 크게 이바지한 선비였다. 허전은 이홍석의 정자 문산정(文山亭)의 기문(記文·건축 기록을 담은 글)을 손수 지어줄 정도로 그를 아꼈다. 이홍석은 허전의 영향으로 실질을 숭상하는 삶의 철학을 갖게 되었고, 정당한 부의 축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대에 농사로 천석에 이르는 살림을 이뤘다. 그는 늘 “내가 재상이 된다면 나라의 부(富)를 크게 증진시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예와 겸양을 알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부의 증진을 통한 국가부흥론을 주창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손자가 바로 산업보국(産業報國)을 강조하며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라는 사실이다. 호암은 할아버지가 지은 문산정에서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다. 허전이 강조한 민족주의와 구국정신, 실용주의가 삼성그룹의 기업철학 및 문화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호학은 지금도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고 한국사회에 녹아 있는 것이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
#성호학파#천주교#성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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