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오래된 연극, 오래된 배우는 아름답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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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인생 50년 손숙의 ‘어머니’ ★★★★

배우 손숙의 연기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어머니’. 울고 웃으며 한을 토해내는 이 작품 속 어머니는 불행한 근현대사 속에서 잡초 같은 생명력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배우 손숙의 연기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어머니’. 울고 웃으며 한을 토해내는 이 작품 속 어머니는 불행한 근현대사 속에서 잡초 같은 생명력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1999년 55세의 ‘어머니’는 이제 더이상 할머니 분장이 필요 없는 69세의 ‘어머니’로 무대에 섰다.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어머니’는 연극배우 손숙(69)의 이름과 늘 나란히 놓인다. 올해 연기 인생 50주년을 맞은 그가 올해 첫 작품으로 선택한 것도 ‘어머니’였다.

이 작품이 14년 전 정동극장에서 공연될 당시 손숙은 “앞으로 20년간 어머니 역할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했고 이후 2000, 2001년 예술의전당, 2004년 코엑스아트홀, 2005∼2007년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등 전국 곳곳의 무대에 올라가며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3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만난 손숙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치며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 살았을 것 같은 한 여인의 삶을 펼쳐보였다. 극의 뼈대는 어머니의 스토리텔링이다. 어머니는 아들(김철영), 며느리(손청강)가 듣거나 말거나 쉴 새 없이 말을 한다. 억눌리고 풀지 못한 한이 이야기로 터져 나온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아득히 먼 과거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카랑한 경상도 사투리가 정겹고 애잔하다.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요리와 바느질이나 익히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깜깜이’가 됐다. 젊었을 적 사랑했던 동네 총각 대신 논 서 마지기에 팔려가듯 돌이(하용부)에게 시집을 갔다. 기생 출신 시어머니(김미숙)의 시집살이, 남편의 바람기에 설움을 겪다 6·25전쟁 통에 큰아들까지 잃고 만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꼭꼭 숨겨뒀던 큰아들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난다. 손자에게 배운 한글로 ‘황일순’ 이름 석자를 꼭꼭 눌러쓰고.

컴퓨터가 놓인 현대식 가정집의 거실 유리문을 통해 과거의 인물과 사건이 넘나들며 시공간이 교차한다. 어머니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은 동화처럼 아련하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이윤택과 호흡을 맞춰온 긴 시간을 내비치듯 손숙은 자유롭고 편안해보였다. 이윤택은 “오래된 연극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공연되니 아름답게 보인다”면서 “오래된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근처 아르코예술극장 로비에서는 손숙의 연기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연극 ‘가을 소나타’에서 손숙의 딸로 출연한 배우 추상미가 사회를 맡았다. 원로 연출가 김정옥은 “배우는 죽기 전까지 현역이다. 120세까지 현역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덕담했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젊었을 때는 숙 언니가 그저 경쟁대상이고 넘어야 할 산이었지만 이제는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어려운 길에서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귀하고 감사한 선배”라고 고개를 숙였다.

소리꾼 장사익은 “1994년 신촌의 작은 극장에서 첫 공연을 할 때 손 선생이 와주셨다”고 했고 소설가 황석영은 손숙의 풍문여고 문예반장 시절을 불러냈다. 250여 명의 문화예술계 선후배, 정계 인사들의 뜨거운 박수와 손숙의 환한 웃음 곁에 창밖에는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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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역에 윤정섭이 번갈아출연한다. 17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만∼5만 원.02-763-1268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어머니#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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