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WISDOM]죽음 무릅쓰고 돕는 건 유전자의 명령 때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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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진화, 뜨거운 주제들… 협력의 진화

지난해 12월 미국 코네티컷 주 뉴타운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희생된 돈 혹스프렁 샌디훅초등학교 교장(47·여). 그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범인에게 달려들었다가 총에 맞았다. 동아일보DB
지난해 12월 미국 코네티컷 주 뉴타운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희생된 돈 혹스프렁 샌디훅초등학교 교장(47·여). 그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범인에게 달려들었다가 총에 맞았다. 동아일보DB
《 지난해 12월 미국 동부의 한 초등학교에서 끔찍한 총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서른 명에 가까운 어린이와 선생님들이 희생됐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했던 교장 선생님, 아이들을 벽장 속에 숨기고 범인을 막아선 선생님, 아예 범인에게 돌진한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그들이 보호본능을 지닌 여성이기에 이렇게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처럼 극단적이지 않을 뿐, 남을 위해 목숨을 걸거나 버리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희생’이란 이름으로 말이죠. 》
무리를 살리는 희생
목숨을 걸고 집단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례는 동물의 세계에도 많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동물이 개미와 벌입니다. 일개미나 일벌은 평생 일만 죽도록 하는 것도 모자라 침입자가 나타나면 자기 몸을 던져 싸우죠. 원숭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위험한 존재가 나타나면 특별한 소리를 질러 집단을 피신시킵니다. 대신 침입자의 주목을 끈 자신은 위험에 빠지지요. 개미나 벌, 원숭이 모두 멍청해서 그런 걸까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슬쩍 피하면 안전할 텐데 왜 굳이 그러지 않을까요.

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전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개미와 벌은 모두 같은 암컷에서 태어납니다. 때문에 이들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나’가 무리지어 사는 셈이죠. 그러니 ‘나 하나’가 죽어서 ‘또 다른 나’가 수없이 많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선 이익이 됩니다.

원숭이는 약간 다릅니다. 원숭이는 개미나 벌처럼 무리가 모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친족끼리 모여 살기 때문에 비슷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죠. 친족이 공유하는 유전자 비율은 수학적으로 간단히 계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는 나와 유전자가 50% 일치하고, 3촌은 25%, 4촌은 12.5%가 일치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1936∼2000)은 “내가 죽는 대신 형제 두 명, 혹은 사촌 여덟 명이 살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 결코 밑지는 죽음은 아니다”란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타적인 인류
인류는 동물들과 또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는 핏줄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원숭이처럼 피를 나눈 집단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거죠.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연락을 하거나 만난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대부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일 것입니다. 그중 상당수는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고요. 그런데 사람은 이런 ‘생판 남’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원숭이에겐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을 행동입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보기 힘드니까요.

인류는 언제부터 이런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을까요. 우선 멸종한 친척 인류인 네안데르탈인 때 그와 관련한 흔적이 보입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라샤펠오생에서는 이상한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됐습니다. 이 화석의 뼈는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원래 구부정하고 입이 쑥 들어간 얼굴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뼈가 구부러진 것은 관절염을 앓았기 때문이고, 입이 쑥 들어간 것은 이가 모두 빠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쉽게 말해 노인의 화석이었던 거죠. 이 화석에는 ‘라샤펠의 늙은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가 빠지고 관절염으로 잘 걷지도 못하는 네안데르탈인 노인이 어떻게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다친 사람을 먹여 살린 흔적도 있습니다. 1950년대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젊은 시절 큰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두개골 흔적으로 보건대 왼쪽 눈은 실명했고 왼쪽 뇌도 크게 다쳤습니다. 신체의 오른쪽을 거의 쓰지 못해 오른팔 뼈가 조그맣게 쪼그라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화석도 노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를 먹여 살려가며 노인이 될 때까지 살게 했다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네안데르탈인보다 훨씬 먼저 나타난 초기 인류 역시 이런 이타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터키 동북쪽의 나라 조지아의 드마니시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은 무려 180만 년 전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석 역시 이가 다 빠진 채로 노인이 될 때까지 살다 죽은 흔적이 보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빙하기였습니다. 누군가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이 없이도 삼킬 수 있게 어떤 ‘가공’을 해주지 않으면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는 호모 속(屬·genus·종보다 상위 개념)이 막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 도왔습니다.

정보를 위한 선택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이런 이타성을 발휘하게 됐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정보’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정보의 보고(寶庫)입니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정보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인류는 변덕스러운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빙하기가 꼭 춥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변덕스럽게도 조금 따뜻한 시절도 있었죠. 건조하거나, 반대로 비가 계속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기후가 변하면 거기에 맞춰 동식물과 환경이 변했습니다. 지형도 바뀌었습니다. 바닷물의 높낮이가 달라져 섬이 육지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류는 변하는 환경을 잘 살폈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비슷한 환경이 되면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활용해 대처했습니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힘이 아닌 정보력에 의존하는 전략을 이용했던 것이죠. 젊은이들은 노인의 생존을 도왔고, 노인은 대신 정보를 전수했습니다. 결국 인류는 다른 어떤 유인원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도 훌륭하게 적응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키워왔습니다. 협력과 이타심입니다. 다시 말해 콩 한쪽도 나눠 먹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능력입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인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현해온 셈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근시가 심한 제가 별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건 누군가 안경을 개발해 준 덕분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안경 없이 네안데르탈인이나 그 이전 인류의 사회에 태어났더라도, 저는 살아남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아무도 제가 곰에게 잡아먹히도록 그냥 내버려두진 않았을 겁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 이 글은 ‘과학동아’와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 동시 연재됩니다. 
 
#O2#인류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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