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전통농법대로 해보니, 땅도 글도 살아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서유구 ‘임원경제지’ 번역 중에 농사 뛰어든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

눈이 많이 오던 5일 오후 경기 군포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에서 만난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오른쪽)과 정용수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 두 사람은 내년 이 땅에서 임원경제지에 나온 견종법(밭고랑에 파종하는 방법)대로 농사를 지을 계획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제공
눈이 많이 오던 5일 오후 경기 군포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에서 만난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오른쪽)과 정용수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 두 사람은 내년 이 땅에서 임원경제지에 나온 견종법(밭고랑에 파종하는 방법)대로 농사를 지을 계획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제공

달콤하면서도 시큼하고 톡 쏘는 맛이 났다. 경기 군포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에서 만난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43)이 건넨 청주였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鼎俎志)에 나오는 방법대로 빚은 청주라고 했다.

“책에선 ‘열(烈·맵다)하다’라고 했는데 글로만 읽으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직접 담가 봤더니 탄산음료를 마실 때 느껴지는 톡 쏘는 맛을 표현한 것임을 알게 됐죠. 그저 ‘맵다’고 했으면 틀린 번역이 됐을 겁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번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지요.”

‘조선판 브리태니커’로 불리는 임원경제지는 실학자인 풍석 서유구 선생(1764∼1845)이 직접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터득한 실용 지식을 총망라한 책이다. 농사의 전 과정을 담은 본리지(本利志)를 시작으로 음식을 다룬 정조지, 옷과 집에 대해 정리한 섬용지(贍用志), 조선 후기 의학을 집대성한 인제지(仁濟志) 등 16지(志) 2만8000여 항목으로 구성됐다.

임원경제연구소는 풍석 선생의 대작을 번역하기 위해 2002년 설립된 민간 연구소로 농업기술사 전공인 정 소장을 포함해 각 분야 전공자 41명이 번역에 참여했다. 올해 6월 개관서 ‘임원경제지-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씨앗을 뿌리는 사람)을 출간했고 2014년까지 임원경제지 전체를 55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정 소장과 연구원들은 번역하는 틈틈이 임원경제지에 나온 방식대로 술도 만들고 농사도 짓는다. 올해 처음 벼농사를 지은 곳은 동래 정씨 동래군파 16대 종손인 고 정운석 옹(1913∼2012)과 셋째 아들인 정용수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64) 등 9남매가 지난해 5월 문화유산국민신탁에 종택과 함께 기증한 땅이다. 당시 정 옹 가족은 종택 일대가 군포시의 재개발 계획에 편입되자 토지 보상금을 포기하고 전답 1만8176m²(약 5500평)를 국가에 기증했다. 기증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조건이었다. 현재는 정 대표가 종택 안에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무실을 두고 주변 땅을 귀농 교육 및 실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 옹 가족이 기증한 땅에서 정 소장이 임원경제지대로 농사를 짓게 된 데는 둘의 오랜 인연이 작용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던 정 소장은 본리지를 번역할 때 수시로 어려움에 부딪혔고 2004년 정 대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친환경 전통 농법에 목말라 있던 정 대표도 임원경제지라는 거대한 콘텐츠를 번역하고 연구하는 정 소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함께 전남 청산도 등 지방 답사를 통해 전통 농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임원경제지 본리지에 나온 농법대로 화학 비료와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파종부터 추수까지 손으로만 농사를 지었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 교육을 받은 이들과 임원경제연구소 연구원,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후원자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당연히 비료도 유기물만 사용했습니다. 종택 뒤편에 뒷간을 만들어 똥과 오줌을 모았지요. 낙엽이나 볏짚, 음식물로 퇴비를 만들었고요. 올해 30가마 정도를 수확했어요. 농약과 화학 비료를 쓴 농법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지만, 땅도 살고 사람도 사는 방식으로 한 것이지요.”(정용수 대표)

“학자로서 서유구 선생의 농법이 21세기에도 가치와 실용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번역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올해 논농사를 지으면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하나하나 계속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정명현 소장)

두 사람은 내년엔 서유구 선생이 임원경제지에서 수없이 강조한 ‘견종법(견種法)’으로 밭농사를 지을 예정이다. 견종법은 두둑 사이에 움푹 파인 밭고랑에 파종하는 방식. 정 소장은 “서유구 선생이 적은 노동력에 많은 수확량을 낼 수 있는 농법이라고 썼지만 실제 우리나라 농업사에서 많이 실천되지 못했다”며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궁금하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지역 먹을거리 운동을 실천하고 싶다”고 했다. “여기서 나온 먹을거리를 군포 사람들이 먹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면 이 지역 사람들도 농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어요? 아버지가 기증한 이 땅이 문화와 생명이 살아 숨쉬는 친환경 농업 공동체의 기반이 됐으면 합니다.”

군포=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채널A 영상] 막걸리는 텁텁하다?…톡톡 쏘는 ‘거품 막걸리’ 나온다


#임원경제지#전통농법#정명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