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인간은 왜, 인형-로봇을 통해 자신을 모방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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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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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의일본판 포스터. 이 영화는 인간의 존재와 자기 모방 본능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동아일보DB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의
일본판 포스터. 이 영화는 인간의 존재와 자기 모방 본능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동아일보DB
“자신을 닮은 모형을 만드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어린 동물과 어린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살펴보자. 동물의 새끼는 주변 환경에 부닥쳐 가며 조금씩 생존 기술을 배운다. 반면 어린아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색종이를 접어 비행기를 만들고, 모래와 자갈로 산과 집을 만들며, 헝겊조각으로 인형을 만든다.

이미 존재하는 재료들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 지능의 가장 원초적 기능 중 하나다. 이런 만듦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은 모방 능력이다. 인간은 정신을 가지는 순간 이미 재현과 모방을 시작한다. 마음속에 무언가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즉 꽃을 보고 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재현이자 모방이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 사물을 재현하고 변형하며 그를 통해 세계를 확장시킨다.

모든 모방 행위 중 가장 극적인(또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 자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인형에서 시작된 자기 모방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일치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가는 지금, 우리는 인간을 닮은 로봇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생체공학을 이용한 새로운 인류의 창조에 도전하고 있다.

생체 모방의 궁극 역시 인간의 재창조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에는 실용적인 면, 즉 자신이 편해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로봇 공학을 생각해 보자. 청소 등 가사에는 인체와 다른 형태의 디자인이 훨씬 더 실용적일 수 있다. 굳이 인간 형태의 로봇(휴머노이드)이 청소기를 들고 다니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고급 인력이 두 발로 걷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이것은 인형과 로봇을 만드는 행위가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서 온 것이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자기 모방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던진다. 본래 만드는 자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주인’의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창조자와 피조물이 대등하거나, 혹은 피조물이 더 우월할 때 주인의 권리(權利)는 사실(事實)에 압도된다. 이 점에서 자기 모방은 얄궂다. 실패는 주인을 실망시키지만, 성공은 그를 위협한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속의 창조자(대기업 타이렐의 회장)는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복제인간의 수명을 단 4년으로 제한한다. 창조자의 질투다.

영화 속에선 인간들 속으로 숨어든 복제인간을 찾아내는 다양한 방법이 나온다. 눈동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비합리적인 질문으로 지적 융통성을 시험하며, 성장 과정의 기억이 있는지를 시험한다. 한 복제인간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말해 보라’는 말을 듣자마 자 시험 통과를 포기하고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타이렐의 회장은 복제인간 사냥꾼 데커드에게 자신의 여비서를 테스트해 달라고 부탁한다. ‘최신 제품’인 비서의 완벽함을 뽐내고 싶어서다. 그녀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란 타이렐의 모토처럼 복제인간 테스트를 통과하지만, 결국 자신의 기억이 이식된 것임을 알고는 절망하고 만다.

영화는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인간적인 것인가, 아니면 육신을 넘어서는 정신적 숭고함에 인간다움이 있는 것인가. 결론은 이렇다. 한 인간의 위대함은 그 기원에 있다기보다 그 경험에 있다. 즉, 그의 ‘∼임’에 있지 않고 ‘∼함’에 있다. 자신과 싸우다 죽을 위기에 처한 데커드를 구해 주며 복제인간 로이는 말한다. “나는 너희 인간이 상상도 못할 광경들을 봤어. 오리온 셔틀의 불길 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비행선들을 보았고, 탄호이저 바다의 어둠을 밝힌 명멸하는 빛들도 보았지. 이제 그 모든 순간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인간은 자신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가. 신이 되고 싶어서? 자기 존재를 증식하고 싶어서? 아니면 존재의 외로움을 달래 줄 누군가를 만들고 싶어서?

어쨌든 로봇과 인조인간은 과학적인 측면 이외에,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적절한 선을 넘는 순간 바로 문제가 생길 것이지만 말이다. 철학적 사유 없는 맹목적인 추구는 결국 또 하나의 바벨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이 로봇에 부여한 ‘로봇 3원칙’처럼, 자신을 닮은 형상을 만드는 인간에게도 어떠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우선 이런 질문들을 해 보는 건 어떨까. 과연 인간은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 피조물에게 ‘너도 우리처럼 되어라’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인공지능에도 영혼이 깃들 수 있는가…. 계속되는 질문은 우리의 뇌리를 끝없이 맴돌 것이다.

정리=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이 기사는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후마니타스학부장)와의 인터뷰와 이 교수의 저서 ‘기술과 운명’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중간 중간 ‘양념’으로 기자의 생각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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