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조선사연구’ 쉬운 한글판으로 읽는다

  • Array
  • 입력 2012년 11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193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위당 정인보 선생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 첫 회. 1936년 8월 26일까지 실린 이 연재물은 광복 이후 단행본 ‘조선사연구’로 출간됐으며 최근 현대 우리말로 처음 번역돼 나왔다. 동아일보DB
193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위당 정인보 선생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 첫 회. 1936년 8월 26일까지 실린 이 연재물은 광복 이후 단행본 ‘조선사연구’로 출간됐으며 최근 현대 우리말로 처음 번역돼 나왔다. 동아일보DB
일제강점기에 국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1893∼1950)의 역작 ‘조선사연구’(사진)가 한글판으로 처음 출간됐다. ‘조선사연구’는 위당이 1935년 1월 1일부터 1년 8개월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한국고대사 통사(通史)다. 일제의 왜곡된 식민사관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는 탁월한 저술로 평가받으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으나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우리역사연구재단이 이를 현대 우리말로 풀고 상세한 주석을 달아 ‘조선사연구’ 상(上)편을 펴냈다. 내년 초 하(下)편이 출간돼 완간될 예정이다.

책임편집을 맡은 정재승 우리역사연구재단 이사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단 세 명, 즉 위당과 기획자, 문선공뿐이라는 농담이 지식인 사이에 퍼질 정도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훌륭한 역작이 방치되는 것이 안타까워 중학생 이상이면 읽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3년에 걸쳐 풀어냈다”고 말했다. 번역과 주석은 문성재 중문학 박사가 맡았다.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위당은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는 일제에 맞서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단군조선부터 5000년의 역사를 관통할 계획이었으나 1936년 8월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을 당하면서 연재도 282회로 중단됐다. 이 연재물은 1946년 서울신문에서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1983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담원 정인보 전집’(전 6권)의 일부로 출간됐다.

위당은 ‘조선사연구’의 서론에서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국학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그는 또 문헌 고증과 답사를 병행해 역사를 다각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초기 민족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조선사연구’에서 그는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선언하면서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에 대항하고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단군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불러냈다. 또 중국 고대 은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동으로 건너와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한서’ 지리지에 열거된 한사군의 군현들에 대해서는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며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여 년간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위당은 1935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1934∼38년 안재홍 등과 함께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을 망라한 문집 ‘여유당전서’(신조선사) 영인본 간행을 주도하며 실학 발전에 기여했다. 막대한 간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아일보가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위당의 셋째 딸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83)는 신간의 발문에서 “아버지는 광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그것은 잃어버린 내 얼을 되찾는 길이요, 그 얼을 되찾는 길은 국학의 진작(振作)에 있다’고 보았다”며 “1950년 6·25의 변란이 터져 아버지가 북으로 납치되었으니 슬프고 애달프고 원통하다”고 밝혔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정인보#조선사연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