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이 학습만화에 빠질 때, 미국 아이 동화 - 소설책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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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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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베스트셀러 태반 학습서… 美선 판타지 등 문학작품 주류
지식-정보 편향 독서습관 감성과 창의력 신장 해쳐


초등학교 4학년 박동현=‘마법천자문 22권’ ‘Why? 한국사 신분과 직업’ ‘퀴즈! 과학상식-황당 수학’ ‘초등 지리 생생 교과서’ ‘10원으로 배우는 경제 이야기’ ‘공부가 되는 별자리 이야기’. 요즘에 엄마가 사주신 책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라면 학습만화 코너로 달려간다. 마법천자문을 읽고 한자 얘기를 하면 엄마가 좋아하신다. 다른 책들은 엄마가 학교 공부할 때 도움이 된다고 골라주셨다. 숙제도 많고 학원도 가야 하는데 재미없는 책은 읽기 싫다.

동현이 엄마 김수영(36)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기왕이면 학습에 도움 되는 책을 읽었으면 한다. 학습만화를 살 땐 고민도 된다. 여자 캐릭터를 글래머로 그린다든지 살짝 자극적으로 꾸민 면이 있다. 그래도 한자 공부 만화를 읽으면 한자를 정확하게 쓸 수는 없어도 대강 기억은 하니까 위안을 삼는다. 동현이 친구 엄마들이 꼭 읽히래서 과학에서 단원별 개념을 정리해 모아놓은 책을 구했는데 잘 안 읽어서 고민이다. 》
○ 베스트셀러 목록 점령한 학습만화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학습만화코너에서 한 아이가 책을 고르고 있다. 처음에 코믹만화코너에서 만화책을 뒤적이던 이 아이는 
어머니가 “만화책은 안 돼, 만화책은 안 산다 그랬지?”라고 하자 이곳 학습만화코너로 왔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학습만화코너에서 한 아이가 책을 고르고 있다. 처음에 코믹만화코너에서 만화책을 뒤적이던 이 아이는 어머니가 “만화책은 안 돼, 만화책은 안 산다 그랬지?”라고 하자 이곳 학습만화코너로 왔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집계한 올해 1∼9월 어린이책 베스트셀러를 집계한 결과 10위권의 절반을 학습만화가 ‘점령’한 것으로 나타났다. 1∼3, 7위 4권이 마법천자문 시리즈다. 과학실험 만화인 ‘내일은 실험왕’ 20권이 10위에 올랐다. 9위 ‘공자 아저씨네 빵가게’도 책 소개란에 3∼6학년 국어, 도덕 교과의 관련 단원을 명시해둔, 사실상 학습서다.

반면 미국 인터넷서점 아마존의 어린이책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 중 7권이 판타지나 창작동화, 소설 등 순수 문학이다. 한국 어린이들이 ‘학습’이라는 키워드에 매여 있을 때 미국 어린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이야기의 세계를 누비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학습만화를 통해 자녀가 성적도 올리고 책에 흥미도 붙이기를 기대한다. 초등학생 학부모 윤진영 씨(38)는 “학교에서 보는 한자 급수 시험이 있는데 마법천자문은 시험에 맞춰서 진도 빼듯이 구성돼 있다. 한자 공부 시키려면 힘들 텐데 마법천자문은 아이가 스스로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학습만화는 독서에 흥미를 갖게 하고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내는 장점이 있지만 올바른 독서습관, 이해력이나 상상력, 어휘력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는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텍스트 위주의 책으로 관심이 옮겨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시험에 나오는 책 권하는 부모

학습만화에서 나아가 교과서와 직접 관련이 있는 책을 골라 사주는 부모들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김은숙 씨(33)는 지난해 말 교육 관련 인터넷 카페에서 ‘교과 연계 도서 목록’을 구했다. 책 표지에 관련 교과를 써둔 책도 있다. 1학년 1학기 ‘읽기’ 교과의 4단원 ‘아, 재미있구나!’를 대비하기 위해 ‘1학년을 위한 동시’를, ‘슬기로운 생활’ 6단원 ‘와! 여름이다’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갯벌에 뭐가 사나 볼래요’를, ‘듣기, 말하기’의 1단원 ‘배우는 기쁨’을 위해서는 ‘칠판 앞에 나가기 싫어’를 구입했다. 김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피할 수는 없다. 어차피 필요한 것이라면 독서와 공부를 결합한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권우 출판평론가는 “이런 행태는 독서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당장 가치를 창출하지 못해도 즐겁고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 책읽기인데, 눈앞의 성과를 위해 독서를 한다면 장기적으로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어린이책은 출간 후 책을 읽은 교사나 학부모, 전문가들의 평가를 거쳐 천천히 스테디셀러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경제·경영 분야 서적이 출간 2주 만에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출판 시장이 불황을 겪으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어린이책 출판사들이 창작물의 기획과 신인 작가 발굴에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요즘엔 ‘팔리는’ 학습 관련 서적들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한다.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창작동화는 대부분 10년 전 출간된 작품들이다.

동화작가 안영은 씨는 “최근 출판사에서 들어오는 의뢰가 정보 그림책 위주다. 어린이책에서 지식과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감성과 창의력이라는 기초가 외면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새로운 창작물이 활발히 나오지 않아) 어린이책 출판 트렌드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아이들이 볼만한 창작동화가 없고, 그래서 아이들이 창작 동화를 외면하는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학습만화#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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