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놋쇠로 만든 그릇 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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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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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문화 톺아보기
구리 71.43%+주석 28.57% 정확히 합금한 방짜의 신비

주물유기는 이처럼 곱고 단아하며 장식도 붙일 수 있다.
주물유기는 이처럼 곱고 단아하며 장식도 붙일 수 있다.
《 추석이 지나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우리 선조들은 백자 대신 놋그릇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단오 이후 여름철엔 시원한 백자, 겨울철엔 중후한 놋그릇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놋그릇은 보온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은은한 광택과 온후한 멋, 그리고 품위를 지녀 우리 민족이 가장 애용해 온 그릇이다. 한때 ‘녹나는 불편한 구식 그릇’으로 외면받았던 놋그릇은 식중독균과 유해물질을 잡아 주는 효능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최근 ‘건강과 멋의 그릇’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
일본의 국보를 모아 둔 쇼소인(正倉院·일본의 왕실 유물 창고)에는 8세기 나라시대 도다이지(東大寺)를 지을 때 신라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이 선물로 가져간 유기가 보관돼 있다. 쇼소인이 비공개로 보관 중이라 보려면 ‘일왕의 허락’이 필요하다. 이 신라 유기는 주물로 만든 밥그릇과 접시가 각각 450점, 방짜 놋숟가락이 700점인데 그릇 사이에 끼워 둔 종이에는 각 유기의 근수까지 소상히 적혀 있다(방짜를 만드는 우리 대장간에서는 합금 비율이나 무게를 모두 근수로 계산해 왔다).

인류는 예로부터 다양한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 왔지만 놋그릇을 쓰는 나라는 세상에 우리나라밖에 없다. 쇼소인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이 유기를 써 온 역사는 매우 오래 됐다. 우리나라는 시대나 신분 계급, 그리고 용도에 따라 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와 도기(옹기), 발우 같은 목기와 곱돌그릇까지 다양하게 써 왔다. 하지만 놋그릇은 고대부터 산업화 시대 직전까지, 그리고 임금님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가장 널리, 가장 오랫동안 애용해 온 그릇이다. 특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은으로 만들 수 없을 때는 꼭 방짜로 만들어 썼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기나 유리그릇, 또는 목기를 주로 쓰는 데 반해 우리가 스테인리스스틸 수저와 밥그릇, 컵 등 쇠로 만든 식기류를 거부감 없이 쓰는 것도 놋그릇을 오랫동안 써 온 경험에서 온, 금속에 대한 친화성 덕택일 것이다.

○ 방짜 그릇 만드는 나라는 한국뿐

1 방짜로 만든 반상기. 1980년대부터 방짜로 작은 그릇까지 만들 수 있게 됐다. 2 우리 민족은 숟가락만은 언제나 방짜유기를 써왔다. 3 불전에 올리는 그릇 중 생쌀을 담는 생미기. 방짜유기다. 4 굽 높은 궁중제기. 방짜로 두드린 자국이 멋지다. 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출판국 출판사진팀 land6@donga.com
1 방짜로 만든 반상기. 1980년대부터 방짜로 작은 그릇까지 만들 수 있게 됐다. 2 우리 민족은 숟가락만은 언제나 방짜유기를 써왔다. 3 불전에 올리는 그릇 중 생쌀을 담는 생미기. 방짜유기다. 4 굽 높은 궁중제기. 방짜로 두드린 자국이 멋지다. 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출판국 출판사진팀 land6@donga.com
금속은 오랫동안 인류가 사용해 온 그릇 재료다. 은그릇이 대표적이다. 고대에 은은 금보다 더 귀한 금속이었던 데다 독과 접촉하면 색이 변하는 특성 덕에 식기로 각광받았다. 구리는 금색을 낸다는 점 때문에 인기 있는 그릇 재료였다. 구리로 그릇을 만들 때는 여러 가지 다른 금속을 합금하는데, 고대 로마 사람들이 납을 섞은 구리그릇에 포도주를 데워 먹어 납중독에 걸린 사실이 유명하다. 로마 사람들이 납을 섞은 것은 포도주 맛을 달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고, 납을 섞으면 그릇이 더 반짝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 선조들은 로마 사람들보다 현명했던 것 같다. 우리 유기는 용도에 따라 구리에다 상납(주석)이나 아연을 섞었다. 식기와 방짜유기는 상납을 합금한 향동을 재료로 했고, 주물로 제작하는 촛대나 향로 등 일반 생활용구는 아연을 합금한 주동을 썼다. 오늘날 유기는 모두 놋그릇이라 통칭하지만 본래 상납 합금한 향동만 ‘놋’이라 하고, 아연 합금한 주동은 ‘퉁(銅)’ 또는 ‘짐’(주물의 옛말)이라고 불렀다. 즉 건강에 좋은 놋쇠로는 주물 식기나 두들기는 단조(鍛造) 과정을 거치는 방짜를 만들고, 가공하기 쉬운 아연 합금으로는 주물 방식으로 다양한 생활 용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주물 식기와 방짜유기를 상납 합금한 놋쇠로 만든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정확한 비율로 합금한 놋쇠는 은그릇처럼 독에 반응하며, 두들겨 방짜를 만들면 그릇 재질이 얇아져 큰 그릇도 가볍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놋그릇을 만들려면 구리와 상납의 합금 비율이 중요하다. 보통 구리에다 상납을 합금하면 잘 깨지므로 17% 이상은 섞을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놋그릇은 구리 71.43%에 상납 28.57% 비율로 합금한다. 이 비율로 합금해야만 두들겨도 깨지지 않아 방짜를 만들 수 있고, 이렇게 만든 놋그릇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악성 대장균 O-157 등 세균을 제거해 주며, 인공 첨가물 또는 음식이나 농약이 들어간 식품을 담아 두었을 때 그릇 또는 음식 색깔이 변한다. 놋쇠로 만든 화분이나 꽃병에서 식물은 더욱 오랫동안 싱싱하게 살아 있고, 찬합에 담긴 생선이나 고기는 더 오래 신선도를 유지한다.

오늘날 방짜 기술을 가진 나라는 몇 안 된다. 한국 외에는 중국과 인도네시아, 터키, 미국(이민한 터키인에 의해 기술이 건너갔다) 정도다. 그들은 주로 징이나 심벌즈 같은 악기를 만들 뿐, 방짜로 그릇까지 만들어 내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우리는 징과 꽹과리, 바라 같은 악기는 물론이고 대야와 입구가 좁은 요강까지 방짜로 만들어 낸다.

○ 섬세하고 작은 그릇은 주물 제작

방짜는 주로 단순하고 큰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작은 그릇은 두들겨 만들기 힘든 점이 있고, 두들겨 얇아진 그릇에는 다양한 장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인이 복잡하고 장식이 많이 들어가는 기물이나 작은 그릇은 주물로 제작한다. ‘안성맞춤’의 안성유기는 뛰어난 주물 제작으로 유명하다.

촛대나 향로 등 음식을 담지 않는 기물도 주물로 제작하는데, 이런 물건을 주물로 만들 때는 상납뿐만 아니라 아연이나 철 등 다른 금속을 섞어도 크게 상관이 없다. 단, 반상기만은 주물로 제작하되, 건강을 고려하여 방짜유기를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구리와 상납 합금으로 만든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방짜만 찾는 경향 때문에 반상기도 방짜로 만들기도 한다(공구가 현대화되면서 작은 그릇도 방짜로 만들 수 있게 됐다). 주물제작인 경우는 놋쇠 합금 비율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방짜라면 합금 비율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수저만은 꼭 방짜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유기를 관리할 때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녹과 화기다. 특히 방짜는 불에 닿으면 깨지기 쉬우므로 불로 가열하는 그릇은 주물유기가 낫다. 전통적으로 화로는 주물로 제작해 왔다. 간혹 고기 굽는 판이나 전골냄비를 방짜유기로 쓴다고 선전하는 음식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가정에서 놋그릇을 쓸 때는 쓰고 난 뒤 바로 씻어 물기를 완전히 말려 보관하면 녹이 날 일이 없다. 곧장 설거지할 수 없을 때는 물에 다 잠기도록 두면 된다. 녹이 났을 때는 유기점에서 파는 세제를 쓰면 쉽게 닦인다. 장기간 보관할 때는 비닐로 싸서 공기를 차단하면 오래도록 노란색을 유지할 수 있다.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방짜#놋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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