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두 번째로 싼 집’ ‘머리 못하는 집’… 감성에 호소하는 가게서 지갑 더 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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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싼 집’ ‘머리 못하는 집’… 감성에 호소하는 가게서 지갑 더 연다
■ 언더독 마케팅

2000년대 중반 ○라면 TV광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차승원이 나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라면은 ○라면이 아닙니다.”

보통은 자기네 제품이 ‘가장 뛰어나다’ ‘가장 인기가 좋다’, 심지어 ‘가장 오래됐다’ 따위의 자랑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1등이 아니다’란 고백을 늘어놓다니. 차승원은 맛있게 라면을 먹은 뒤에야 광고주의 속내를 넌지시 전한다.

“이렇게 맛있는데, 언젠가는 1등하지 않겠습니까?”

‘언더독(상대적 약자) 효과’를 활용한 마케팅의 전형적 사례다. 스스로 강자가 아닌 약자를 표방함으로써 사람들의 ‘공감’을 사려는 의도다. 한때 많이 보이던 ‘우리나라에서 휴대폰 두 번째로 싼 집’ ‘머리 못하는 집’ 등의 간판도 비슷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렇듯 언더독 마케팅의 사례가 무수히 발견된다. 당신은 특정 기업이나 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스토리에 감동한 적이 있는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주인공이 보란 듯이 일어서는 뻔한 드라마에 열광해 본 적은. 불면 날아갈 듯한 ‘청순가련형’ 여성이나 “돌아가신 엄마와 닮았다”며 접근하는 남성에게 마음을 뺏겨본 기억은 없는가. 이 모두가 당신의 마음을 뺏기 위한 ‘언더독 마케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노무현은 언더독, 이명박은 밴드왜건 효과

사실 언더독 마케팅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정치판이다. 1948년 미국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 해리 트루먼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론조사 기관에선 듀이의 득표가 크게 앞설 것으로 예상했고 각 언론도 공화당의 승리를 점쳤다. 결과는 트루먼의 4.4%포인트 차 승리. 언론은 이때부터 ‘언더독 효과’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흔히 ‘대세론’이라고도 하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다. 2002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이회창 대세론’을 뒤엎은 언더독 효과,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대선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은 밴드왜건 효과 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언더독과 탑독은 수시로 변한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는 케냐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난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라는 ‘언더독 스토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 막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탑독’의 위치에 있었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가 외려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오바마가) 의회연설문(취임사)을 써둔 것 같다”며 언더독 마케팅에 나서기도 했다.

언더독과 탑독의 자리바꿈은 9·11테러 때도 나타났다. 국제사회의 절대강자(탑독)였던 미국은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순간 연민의 대상(언더독)이 됐다. 그러나 미국은 오래지 않아 중동에 미사일을 퍼붓는 탑독의 자리로 돌아갔다. 불과 몇 해 전까지 세계 1위 휴대전화 제조업체였던 핀란드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장 대응 실패로 인해 언더독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 대신 ‘변방국가’의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는 이제 경쟁자(애플)의 변칙적 공격(특허소송)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탑독의 자리에 올랐다.

○ 스토리가 있어야 지갑이 열린다

언더독 마케팅은 ‘감성 마케팅’의 하나다. 어차피 기능이나 가격에서 큰 차별화가 힘들다면 소비자의 이성이 아닌 감성을 자극하겠다는 것이다.

김나경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결점 드러내기는 소비자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며 “소위 엄친아에게는 끌리지 않지만 허점이 있는 친구에게는 친근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소비는 스포츠팀 응원이나 드라마 시청과는 달리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문제”라며 “무조건 ‘나는 약자다’라고 광고한다 해서 소비자가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언더독에 관심을 가지지만 이를 소비로 연결하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게 바로 ‘스토리’다.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언더독 브랜드의 세 가지 공통된 스토리로 △초라한 시작 △희망과 꿈 △역경을 이겨내는 도전정신을 들었다. 허름한 차고에서 창업해 세계 최고 기업 반열에 오른 구글이나 스티브 잡스의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애플이 그러한 사례다. 여 교수는 “기업들은 언더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언더독 브랜드 일대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스타벅스는 실적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이 방법을 썼다. 1971년 브랜드 출발지였던 시애틀의 재래시장 ‘파이크 플레이스’를 신제품(사진) 이름으로 쓴 것. 회사의 ‘초라한 시작’을 통해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시도다. 정보기술 기업 HP도 자사의 웹사이트에 초창기의 초라한 시작을 소개하는 스토리 마케팅을 하고 있다.

물론 언더독에 관한 선호도가 세대별로 차이가 있는 만큼 마케팅에서도 타깃에 적합한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 이번 한중일 조사에서 20대 한국인은 다른 세대에 비해 패배자형에 가까웠고 언더독 스토리에 대한 선호도도 낮았다. 대홍기획 브랜드컨설팅부문의 강태호 선임연구원은 “조사 결과만 보면 젊은층에선 이미 언더독 신화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에게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언더독 성향을 강조하는 마케팅보다 직접적인 ‘힐링’을 제공하는 이벤트가 오히려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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