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캘란 증류소의 크레이그엘러키 하우스에서 바라보이는(아래 오른쪽)의 계곡 풍경. 건너편 도보변의 하얀 건물이 크레이그 엘러키 호텔이다.
《스카치위스키(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된 위스키)가 이렇게 푸대접 받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 한 해 4000만 병 이상을 수입(세계 10위)하고 3000억 원 이상 어치(세계 5위·이상 2007년 현재)나 마셔대는 세계적인 위스키 애호국인데. 집집마다 한 병씩은 챙겨놓고 해외에서 귀국길엔 반드시 한 병은 사오는 게 버릇처럼 된 우리가 위스키를 푸대접한다니…. 하지만 최근 스코틀랜드 현지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위스키의 실체와 거기에 담긴 맛과 향을 생각하면 세계 최고라는 스카치위스키가 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많이, 그리도 오래 마셔온 이 술. 그런데 과연 내가 스카치위스키의 참맛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분이 적지 않을 듯하다. 최근 스카치위스키를 주제로 스코틀랜드 취재여행을 다녀왔다. 스카치위스키 중에서도 진수-전체 위스키 생산량의 단 5%뿐-로 불리는 싱글 몰트위스키의 맛을 찾아서 인데 소득은 컸다. 지금껏 몰랐던 스카치위스키의 진가를 확인한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싱글 몰트스카치위스키의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장담컨대 알고 난 뒤엔 스카치위스키가 전혀 다른 맛과 감흥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계 최고의 싱글몰트위스키로 선정(위스키매거진)된 맥캘란 18년산. 맥캘란 제공런던 히스로 공항을 이륙해 북행하던 항공기가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의 중심, 애버딘에 착륙한 건 약 한 시간 만이었다. ‘싱글 몰트위스키의 동페리뇽’-동페리뇽은 샴페인의 최고 브랜드-이라는 맥캘란 증류소는 여기서 동북 방향으로 한 시간쯤 차로 가야 하는 크레이그엘러키란 시골에 있다. 위스키는 원료에 따라 몰트(발아보리)와 그레인(옥수수 호밀 등)으로 나뉜다. 또 블렌딩(여러 위스키를 섞어 맛을 내는 공정) 방식에 따라 ‘싱글몰트’와 ‘블렌디드’가 있다. 싱글몰트는 몰트위스키 중에서도 한 증류소에서 생산된 것만 섞은 것이다. 반면 블렌디드는 그레인위스키에 몰트위스키를 첨가한 것으로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발렌타인 등이 대표 브랜드다. 그레인위스키는 양조가 쉽고 생산량은 많지만 몰트위스키 같은 풍미는 적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1853년)됐는데 그곳도 맥캘란 근방의 증류소(글렌리벳)다.
당시는 4월 하순. 계절은 봄이지만 차가운 북해의 냉기 탓인지 북위 57도의 이곳 하이랜드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한기가 느껴질 만큼 냉랭했다. 맥캘란 증류소 근방에 이를 즈음, 멋진 철제 다리가 보였다. 스페이 강이다. 미국인이라면 ‘위스키 크릭’(위스키가 흐르는 개울)이라고 부르고 싶어 할 이 강. 스코틀랜드 전국의 70개 증류소 중 40개가 몰린 위스키 집산지 ‘스페이사이드’(스페이 강 주변)란 지명의 근간이 된 강으로 증류소는 대부분 강안과 주변에 있다. 맥캘란도 같다. 강안의 언덕에 있다. 양조용 물(지하수)도, 증류용 냉각수(하루 100만 L의 강물)도 강안지하와 강변에서 취수해 싱글 몰트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다. ‘글렌피딕’ 증류소도 이 강에 유입되는 근처 피딕 강안에 있다. ‘글렌’은 게일어(語)로 ‘계곡’. 글렌모렌지 글렌그랜트 등 이 지역 싱글몰트 이름에 ‘글렌’이 많은 이유를 알 만하다. ‘강이 흐르는 계곡’이 증류소 최고 입지여서다.
위스키 명가에서 묵는 즐거움
도로를 벗어나 야트막한 구릉의 숲길로 접어들자 맥칼란 증류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진입로는 거대한 정원의 잔디 언덕 사이로 이어졌다. 그 왼편은 스페이 강, 반대편은 대형 창고. 정면에도 건물 몇 채가 보였다. 큰 건물은 죄다 위스키 저장창고인데 주변엔 돌로 지은 오래된 주택이 마을을 이뤘다. 증류소는 거기에 가려 반쯤만 보였다. 맥캘란의 증류기가 아주 작다. 스페이사이드에서 가장 작다. 직원도 50명 정도. 그중 28명이 이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 매일 위스키를 점검하고 통 운반이 집안일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증류기 건물의 반대편, 스페이 강안 언덕의 정원에도 몇 채가 있다. 술 기념품을 파는 방문자센터와 이스터엘키스하우스, 게스트하우스(손님용 숙소)다. 이스터엘키스하우스는 사무실을 겸한 내방객 숙소인데 맥캘란 레이블에도 등장하는 상징물. 1700년 맥캘란 위스키가 태어난 곳으로 작은 성 모습의 집은 멋지게 단장됐다. 맥캘란이란 이름은 근방 교회에서 왔다. 교회는 터만 남았다. 나는 이스터엘키스하우스의 3층 객실에서 사흘간 머물렀다.
위스키 명가에서 묵는 즐거움은 특별하다. 객실 내 유리 술병엔 싱글몰트가 떨어지지 않는다. 거실엔 30년 것까지 수십 병의 맥캘란이 총망라돼 언제라도 마음껏 맛본다. 식당에선 웰컴 디너가 다섯 코스로 제공됐다. 매 코스 다른 맛과 향의 맥캘란 싱글몰트가 음식에 맞춰 제공됐다. 위스키 탄생지에서 스코틀랜드 음식과 맥캘란 싱글몰트를 함께 맛보는 즐거움. 최고의 호사다.
이튿날 아침. 증류소 투어에 나섰다. 맥캘란 증류소에는 증류기만 있다. 보리를 싹 틔우고 건조시킨 후 빻는 공정은 산하 다른 증류소에서 한다. 그래서 원료 가공 과정은 전시장을 통해 보여준다. 투어는 공정에 따라 진행됐다. 발아 보릿가루를 탄 물에 효소와 효모를 넣고 진행하는 당화(탄수화물을 당분으로 변화시키는 것)와 발효(당분을 알코올로 변화시키는 것)과정-여기까지는 맥주 양조와 비슷-거기서 추출한 알코올 9%의 보리술(wash)에 열을 가해 수증기로 만든 다음 냉각기에 통과시켜 순도 높은 알코올 추출 과정(증류) 순이다. 인상적인 것은 붉은 빛깔의 구리통. 모양은 비슷해도 제각각 당화 발효 증류에 쓰이는 다른 설비다. 특히 뒤집어 둔 나팔모습의 증류기는 모양이 핵심이라고 한다. 기화된 알코올을 유도하는 목-‘백조의 목’이라고 불림-의 높이에 따라 주정의 특성이 달라져서다.
맥캘란의 비밀은 주정과 오크통
맥캘란 증류소의 상징인 이스터엘키스하우스. 스페이 강안의 언덕 위에 있다.(위 사진) 스페이사이드에서 가장 소규모의 맥캘란 증류기. 기화된 알코올은 구부러진 파이프를 따라 냉각기로 보내지는데 이걸 ‘백조의 목’이라고 부른다.(아래) 맥캘란 제공 맥캘란은 달콤함과 우아함의 밸런스가 완벽한 싱글몰트다. 그래서 코냑(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포도주를 증류해 만든 브랜디)처럼 식후에 즐기기 좋다. 향취는 사과와 제비꽃의 화사함이 특징. 그러면 싱글몰트의 최고봉이라는 맥캘란의 맛과 향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걸까. 투어 중엔 그 부분에 질문과 대답이 집중됐다. 첫 번째는 주정이다. 주정은 두 번의 증류 중에서도 2차 증류기로 도출한 알코올(new make spirit)만 쓴다. 이곳의 ‘스틸 맨’-증류기술자-은 그중에서도 처음과 나중 것은 버리고 순도 높은 중간 것(The Finest Cut)만, 그나마도 약간(매회 16%)만 취한다. 23∼25%를 쓰는 여타 증류소와 다르다. 두 번째는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캐스크(cask)-오크(참나무)통-다.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내 오크통에서 3년 이상 숙성된 것’만 지칭한다. 하지만 싱글몰트의 숙성기간은 통상 8∼10년. 프리미엄 브랜드를 지향해서인데 향미의 80%가 캐스크에서 온다고 한다. 참나무에서 자연스레 추출되는 타닌과 바닐라향이 알코올에 녹아들며 맛과 향을 형성한다.
이게 증류소가 캐스크에 다걸기(올인)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도 맥캘란은 독보적이다. 스페인 북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베어 남부 헤레스에서 만든 오크통으로 이 지방의 셰리(알코올을 첨가한 강화와인) 숙성에 사용했던 것을 쓴다. 그 양은 현지 오크통의 95%. 말린 과일에서나 맛보는 우아한 단맛과 초콜릿풍의 부드러운 감미, 상큼한 사과향과 화사한 제비꽃향의 맥캘란 싱글몰트는 참나무통에 밴 셰리가 69.8%의 고농도 알코올에 녹아들며 이뤄진 미묘한 화학적 결합의 결과물이다.
좀 더 미묘한 맛을 내기 위해 미국산 오크 캐스크(전체의 35%)도 쓰는데 생나무 통과 버번(미국위스키)통이다. 9년 전 개발한 ‘1824’ 같은 맥칼란의 ‘파인오크’ 시리즈는 이 세 타입 캐스크에서 숙성된 원액을 조합해 탄생시킨 라이트 싱글몰트다. 현재 매출의 20∼30%를 차지할 만큼 젊은층에 인기다. 다른 양조장도 셰리오크를 쓰기는 한다. 그러나 맥캘란처럼 장기 숙성용으로 쓰기보다는 단기간에 맛 첨가용으로 이용한다. 그래서 맥캘란처럼 한 번 사용 후 폐기하지 않고 반복 사용한다. ‘1824’는 맥캘란의 두 번째 증류소가 허가장을 받은 기념비적인 해다.
증류소 투어는 증류소를 나서 저장고로 이어졌다. 안내된 곳은 1876년 돌을 쌓아 지은 키 낮은 창고. 맥캘란의 맛을 결정한다는 셰리오크 캐스크가 어두운 실내에 가득 있었다. 바닥은 파쇄석으로 덮인 맨흙. 위스키는 3단으로 쌓인 캐스크 안에서 수십 년째 긴 잠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나무통은 ‘숨을 쉰다’. 외부의 습기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알코올과 함께 수분을 증발시키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증발량이 적지 않다. 연간 2%다. 10년이면 45L가 사라진단다. 그걸 여기 사람들은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부른다. 위스키를 ‘영혼(Spirit)’이라고 부르니 그 영혼을 간수해주는 이가 천사임은 당연한 추론이다.
최고 평점의 파인오크 18년
투어의 마지막 순서는 늘 테이스팅이다. 맥캘란의 테이스팅룸은 위스키메이커가 각 캐스크의 위스키 샘플을 섞는 작업장과 붙어 있었다. 운 좋게도 그날 작업장엔 위스키메이커 밥 달가노가 있었다. 그래서 내부를 볼 수 있었는데 실험실을 방불케 할 만큼 수많은 유리병에 위스키가 담겨 있다. 그는 맥캘란 180년 역사 중 주목받는 ‘파인오크’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이날 테이스팅은 뉴메이크스피리트(주정)를 필두로 셰리오크 12년, 파인오크 15년, 최고 평점의 18년, 파인오크 21년, 마지막으로 셰리오크 30년으로 이어졌다. 위스키도 와인과 같다. 색과 향, 맛을 차례로 음미한다. 알아두면 좋을 상식 한 가지. 위스키 숙성 정도를 밝히는 18년산, 21년산의 숫자는 숙성 연수가 다른 여러 캐스크의 위스키를 섞을 때 그중 가장 적은 해의 수치다. 그러니까 12, 15, 18, 30년을 섞었다면 ‘12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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