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유영만이 풀어보는 생각지도]<끝> 모범생보다 ‘모험생’ 맥가이버에게서 배울 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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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주꾼 ‘브리콜뢰르’

미국 TV 드라마 ‘맥가이버’의 한 장면. 동아일보 DB
미국 TV 드라마 ‘맥가이버’의 한 장면. 동아일보 DB
‘브리콜라주(bricolage)’는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 또는 ‘수리(修理)’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 용어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프랑스 인류학자)의 책 ‘야생의 사고’(1962년)에서 ‘문명사회와 대비되는 부족사회의 지적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부족사회에서 ‘브리콜뢰르(bricoleur·브리콜라주를 수행하는, 즉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대는 사람)’가 하는 역할을 규명하고자 했다.

브리콜뢰르는 보통 부족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는 담당자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과 자원, 만족스러울 만한 도구를 갖고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한정된 자료와 용구를 가지고 자신이 몸담은 부족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능숙하게 수행하는 일종의 ‘손 재주꾼’이다.

○ 맥가이버와 브리콜뢰르

흥미롭게도 우리가 잘 아는 인물 중에도 브리콜뢰르라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예전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인 맥가이버다. 같은 이름의 TV 시리즈(리처드 딘 앤더슨 주연)는 미국에서 1985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됐다(한국에선 MBC가 1986∼1992년 방영).

맥가이버는 화학, 물리학, 지질학 같은 과학적 지식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도구, 그리고 현재 직면한 상황을 절묘하게 조합, 활용해 위기를 극복한다. 주변의 사물이나 도구는 주어진 목적 달성에 맞게 재조합되거나 기능이나 용도가 변경된다. 비료로 폭탄을 만들거나 창고의 밀가루를 폭발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맥가이버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모범생이라기보다 ‘모험생’이며,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책 똑똑이(book smart)’라기보다 거리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스트리트 스마트(street smart)’다.

브리콜뢰르로서 맥가이버가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에는 우연성과 미(未)결정성이 잠재해 있다. 사실 기존의 도구는 기능과 용도가 사전에 결정돼 있다. 그러나 브리콜뢰르가 사용할 때 그 도구는 다른 도구 및 주어진 문제 상황과 어떤 접속을 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도구로 재탄생한다.

브리콜뢰르에게 주변의 도구가 빛을 발하는 것은 문제 상황에 적용될 때부터다. 그의 도구는 실제 문제 상황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가운데 우연한 기회와 만나 새로운 쓰임새와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우연한 기회는 행동하지 않으면 절대 생기지 않는다. 우연한 만남은 다양한 시도 속에서 이루어지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영감(serendipity)을 선물로 가져온다.

○ 문명인이 아니면 생각도 미개하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뢰르의 사고를 이른바 문명인의 과학적 사고와 비교해 ‘야생의 사고’라고 했다. 야생의 사고는 과학적 사고만이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원시 부족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미개인의 사고라고 폄하하는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는 개념이다. 여기에 우리 ‘문명인’들이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이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의견, 경험과 지식만이 옳으며 진리라고 생각하는 자기편향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남태평양 티아베아 섬마을 추장의 연설문을 엮은 ‘빠빠라기’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빠빠라기(문명인)는 가난하다. 그래서 물건에 홀려 있다. 물건 없이는 이제 살아가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은 (이웃끼리) 서로 이름도 알지 못하며, 입구에서 만나는 일이 있어도 마지못해 가볍게 인사를 하거나 적의를 품고 있는 곤충들이 서로 맞부딪쳤을 때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주고받을 뿐이다.’ 원시 부족 추장의 이런 지적이 과연 무지몽매한 헛소리에 불과한가. 오히려 우리가 갖지 못한, 문명의 허울을 꿰뚫는 예리한 시각과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브리콜뢰르에게 배워야 할 두 번째 교훈은 한계에 도전해 원하는 답을 찾아내는 정신과 자세다. 많은 문명인들은 ‘과학적’ 또는 ‘논리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브리콜뢰르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계 지점에서 도전을 시작한다. 충분하지 않은 시간과 자원, 한정된 공간과 조건에서도 지금 쓸 수 있는 자원과 자신의 지식을 조합해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다. 베토벤은 음악이란 불충분한 수단으로 위대한 결과를 이루는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충분한 조건 아래서 창조는 일어나지 않는다. 뭔가 부족하고 결핍된 공간, 심각한 위기와 한계 상황에서 브리콜뢰르는 원하는 답을 찾아낸다.

이런 능력은 재즈 연주자 같은 임기응변 능력과 즉흥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브리콜뢰르들은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을 근간으로 신속한 상황판단과 의사결정, 과감한 행동을 통해 문제나 위기 상황을 능수능란하게 탈출한다.

오케스트라는 정해진 ‘각본’과 연주곡에 따라 한 치의 빈틈없이 화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재즈 연주자로서의 브리콜뢰르는 현 상황에 적합한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그에게 잘 짜인 각본은 오히려 창작욕을 떨어뜨릴 뿐이다. 브리콜뢰르는 주어진 상황이 어떤 음악을 원하는지 마음으로 읽고 거기에 상응하는 즉흥연주를 할 뿐이다.

브리콜뢰르에게 배워야 될 세 번째 교훈은 재미있게 노는 호모루덴스 기질이다. 호모루덴스는 유희의 인간을 뜻하는 용어로 인간의 본질을 유희, 즉 놀이라는 점에서 파악하는 인간관이다. 여기서 유희는 단순히 논다는 말이 아니라 정신적 창조활동을 가리킨다. 브리콜뢰르는 일상의 보잘것없는 사물들을 가지고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혁신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막대기, 빗자루, 깨진 그릇, 굴러다니는 공, 주변의 돌멩이를 주워 모아 놀이에 활용하는 아이들을 한번 살펴보라. 잡동사니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끌어내는 그들의 놀이에서 브리콜뢰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양대 교수(교육공학) 010000@hanyang.ac.kr
#O2#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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