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탄생 250주년…茶山의 향기]<5> 정보화시대 지식경영법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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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다스리면 뭐든 할 수 있어”… 수원 화성 30개월 만에 쌓아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 일의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로드맵에 따라 과학적으로 작업한 다산의 지식경영법은 오늘날에도 유용하다. 그래픽 속 건축물은 수원 화성. 그래픽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 일의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로드맵에 따라 과학적으로 작업한 다산의 지식경영법은 오늘날에도 유용하다. 그래픽 속 건축물은 수원 화성. 그래픽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살던 18세기 조선에는 청나라의 백과전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널려 있는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배열해 체계적이고 유용한 지식으로 바꾸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주요 임무였다. 다산은 이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정보화시대인 오늘날도 정보는 차고 넘친다. 어떻게 하면 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오늘날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했고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등을 펴낸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답을 보내왔다.》

다산은 막강하다. 손대지 않은 영역이 없다. 경학이나 경세학은 그렇다 쳐도 건축설계나 토목 등 자연과학 분야까지도 다뤘다.

정조가 1789년 사도세자의 능원인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놓으라고 다산에게 명했다.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었음에도 다산은 거칠기 짝이 없는 몇몇 기록만 참고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았다.

다산은 건축설계자나 토목기술자가 아니었지만 2년 6개월여 만에 화성 축조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각 분야 전문가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도 하지 못할 일을 전문가도 아니고 경험도 없었던 다산이 척척 해냈다.

○ 다산이 꿰고 있던 엑셀의 원리

다산의 작업 과정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핵심 가치를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왜 하는가’ ‘어떻게 할까’를 물으며 작업의 성격을 파악했고 목표를 설정한 후 구체적인 로드맵을 만들었다. 이런 준비 과정이 끝나면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경학 연구든 건설현장이든 똑같은 원리, 동일한 과정이 적용됐다. 예를 들면 이렇다.

1795년 현륭원에 나무 심는 일이 끝났다. 그러자 정조는 다산에게 “논공행상을 할 것이니 지난 7년간 여덟 개 고을에 심은 나무가 모두 몇 그루인지, 어느 고을이 가장 많이 심었는지 보고하라”고 명했다.

다산은 먼저 나무 심기와 관련된 공문을 다 모았다. 수레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는 뒤죽박죽으로 섞인 공문을 고을별 날짜별로 분류했다. 그리고 고을별로 표를 하나 만들어 가로 칸에 나무 종류, 세로 칸에 심은 날짜, 교차된 칸에 몇 그루를 심었는지 적었다. 이틀 만에 고을별 통계가 잡혔다.

다시 표 한 장을 만들었다. 이번엔 가로 칸에 고을 이름, 세로 칸에 연도, 교차된 칸에 고을별로 정리한 나무 수의 연도별 합산 결과를 옮겨 채웠다. 이렇게 계산해보니 현륭원에 심은 나무는 총 12만9772그루였다. 정조의 명을 받은 지 불과 며칠 만에 고을별로 통계를 낸 단 한 장의 보고서(‘현륭원식목부’)를 올렸다. 정조는 혀를 내둘렀다. 오늘날 사용하는 ‘엑셀’의 원리를 다산은 이미 완벽하게 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너무 많아 일일이 예거하기 어렵다. 다산이 황해도 곡산부사 시절 마을별로 가로 칸에 가구주 이름, 세로 칸에 재산 상황을 기록한 ‘침기부종횡표(砧基簿縱橫表)’로 악명 높은 곡산 아전들의 기강을 단번에 휘어잡은 일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이 같은 표는 오늘날 최고경영자(CEO)가 인사 관리를 할 때도 유용하다.

○ 18세기에 실천한 집단지성

다산의 저술 500권은 오늘날 책으로 치면 70, 80권 정도다. 방대한 작업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저술보다 편집서가 대부분이다. 또 제자들과의 집체 작업을 통해 저술이 이뤄졌다. ‘목민심서’도 스승의 지침에 따라 제자들이 작성한 수만 장의 카드를 바탕으로 편집했다. 그렇다고 다산의 역할이 작은 건 결코 아니었다. 다산은 작업의 핵심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고 문목(問目)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아들과 제자들이 실무작업을 했다. 1차 정리된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다시 정리하는 것도 다산의 몫이었다. 제자들도 단순작업만 한 게 아니라 다산의 방식을 옆에서 보며 배웠다. 이는 정보사회에서 주목받는 ‘집단 지성’의 작업 방식과 비슷하다.

다산은 “잘 알아야 정보를 장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학문을 배우는 기초 단계부터 제자들에게 읽은 책의 중요 부분을 베껴 쓰는 초서(초書)를 시켰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하도록 했고 스승과의 문답도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제자들의 공부를 누적하고 증폭하기 위한 다산 특유의 교육 방식이었다. 필자는 최근 다산의 제자 윤종삼(尹鍾參)이 스승과 주고받은 공부 내용을 기록한 ‘소학주관문답(小學珠串問答)’ 자료를 전남 강진에서 새로 찾은 바 있다.

다산의 제자 훈련은 혹독했고 요구 수준도 높았다. 조금만 게으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다독이는 글로 분발시키고 격동시켰다. 제자별로 써준 각종 증언(贈言·드리는 말씀)들은 맞춤형 교육의 전형이다. 역할을 분담하여 쌩쌩 돌아가던 다산초당의 모습은 시골의 이름 없는 서생들이 조선 최고의 학술집단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는 ‘다산은 위대하다’면서 자꾸 다산을 박제화하고 틀에 가둔다. 배울 것은 안 배우고 죽은 지식만 답습한다. 다산은 ‘천자문’을 비판하면서 대안 교과서로 ‘아학편(兒學編)’을 제시했다. 하지만 21세기 오늘날 한자교육 현장에 ‘아학편’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관습에 젖지 않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해 대안을 마련하려는 다산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원리를 응용해 현재화해야 위력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천하의 다산도 ‘그대로’는 안 된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jung0739@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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