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조선 선비들 지적 허영심 채우는 최고 술안주는 소염통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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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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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탐식가들/김정호 지음/336쪽·1만5000원·따비

조선 후기 양반들의 난로회 풍경을 세밀한 필치로 그린 ‘야연(野宴)’. 머리에 쓴 모자와 털방석, 화로 위에 놓인 벙거지 모양의 고기굽는 철판으로 보아 초겨울 난로회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아래의 남자는 기생이 먹여 주는 고기에 입을 벌리고 있다. 따비 제공
조선 후기 양반들의 난로회 풍경을 세밀한 필치로 그린 ‘야연(野宴)’. 머리에 쓴 모자와 털방석, 화로 위에 놓인 벙거지 모양의 고기굽는 철판으로 보아 초겨울 난로회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아래의 남자는 기생이 먹여 주는 고기에 입을 벌리고 있다. 따비 제공
정조 5년(1781년) 겨울, 정조는 밤늦게 일하는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의 사관을 불러 매각(梅閣)에서 난로회(煖爐會)를 열었다. 난로회는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화로 안에 숯을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기름장, 달걀, 파, 마늘, 산초가루로 양념한 쇠고기를 구워 둘러앉아 먹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매(梅)’자를 시제로 정해 신하들에게 칠언절구를 지어 올리게 했다. 이날 회식자리에 참석한 정약용은 시에서 “임금 하사 진수성찬… 청빈한 선비 입이 황홀하여 놀랄 따름”이라고 읊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명분론이 밥상까지 지배한 시대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분에 맞게 살도록 왕은 12첩 반상, 공경대부는 9첩 반상, 양반은 7첩 반상, 중인 이하는 5첩·3첩 반상을 차려먹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비집고 맛을 탐한 이들이 있었다. 저자는 선비들이 남긴 수많은 문헌과 시 속에서 미식과 탐식의 기록을 찾았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후 밥상의 가장 큰 변화는 ‘육식열풍’이었다. 살생을 죄악시한 불교를 숭상한 고려와 달리 조선의 유교식 제례에는 쇠고기가 올랐다.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선 소염통구이인 ‘우심적(牛心炙)’이 최고 인기였다. 우심적은 중국 고사에서 진나라 주의와 왕희지, 송태조와 보의 우정을 상징하는 음식이어서 선비들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술안주였다. 진나라 장한이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를 먹으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 나오는 순채 나물도 사대부들의 시에 즐겨 등장한 식재료였다.

양민들에게 퍼진 육식열풍에 소 돌림병까지 겹쳐 농사에 쓸 소의 씨가 마를 것을 우려한 왕실은 ‘우금령(牛禁令)’을 내렸다. 세종은 소 도살 현장을 신고한 사람에게 포상하는, 오늘날이라면 ‘소파라치’라 할 만한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정작 세종 본인은 육선(肉饍·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여서 이 정책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좋아했던 음식에는 두부도 있다. 왕실의 능묘를 보살피는 절에서 만든 두부는 중국 황실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대부들은 연포탕(두부를 꼬챙이에 꿰어 닭고기를 섞어 끓인 국)을 먹기 위해 절에 몰려가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 소개한 열구자탕(신선로), 일본에서 전래된 ‘승기악탕’(스키야키) 등 외국 음식도 유행했다.

중종의 사돈으로 권세를 누린 김안로는 개고기 탐식가였는데 맛있는 개고기 요리를 바친 자들을 요직에 등용해 구설에 올랐다. 인조반정으로 공신에 오른 김자점은 갓 부화한 병아리를 즐겼다. 이들의 탐식은 권력을 잃고 나서는 정적으로부터 ‘패륜’으로 공격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은 다양한 음식을 탐하고 이를 글로 적은 ‘음식 블로거’의 원조 격이었다. 조선의 식객을 꿈꾼 그는 이조판서를 상대로 진미가 많이 나는 전북 남원이나 가림(충남 공주 인근) 수령으로 보내달라고 관직 로비를 벌였다. 그는 귀양을 가면서도 ‘새우와 게가 좋은’ 전북 함열로 보내달라고 로비를 벌였는데, 정작 가보니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곳에서 예전에 먹었던 산해진미의 맛의 향수를 되살려 지은 책이 ‘도문대작’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 근검한 식습관을 실천했다. 유배생활 내내 채소를 몸소 가꾸었고, 두 아들에게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라며 진수성찬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런 다산도 귀양살이의 궁핍한 몸을 보신하고자 개고기를 먹었다.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덫을 놓아 산 개 잡는 법과 요리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한식은 중식이나 일식에 비해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사치를 혐오하고, 경제가 좋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미식을 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느냐는 선입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남긴 고서를 읽어 보면 그것은 굉장히 좁은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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