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대한검법협회 발족하는 임성묵 씨

  • Array
  • 입력 2011년 11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법’ 신비함에 빠져…

우리 검법을 통해 임성묵 씨가 찾고 싶은 것은 우리 고유의 사상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우리 검법을 통해 임성묵 씨가 찾고 싶은 것은 우리 고유의 사상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목숨을 버릴 결심을 하니 칼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임성묵 씨(50)에게 1994년은 잔인했습니다. 그 몇 년 전, 부동산 투자를 해 분에 넘치게 들어온 거금으로 물정 모르고 인수한 석재공장 운영이 삐걱대기 시작했습니다. 빚쟁이들이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견디다 못해 아내, 세 살배기 딸과 함께 대문을 잠그고 쥐죽은 듯 숨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다 나락으로 떨어진 셈입니다.

나락에서 ‘건진’ 칼

그때 한 ‘빚쟁이’가 있었습니다. 임 씨가 그에게 직접 빚을 지진 않았습니다. 어음을 할인해 줄 전주(錢主)를 찾던 사람을 임 씨가 그에게 소개해준 게 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음이 부도가 났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날이 퍼렇게 선 전통검을 들고 와서는 대문을 발로 차댔습니다. 덩치 좋은 남성들이 대신 올 때도 있었습니다. 고향인 충남 공주에서 어릴 적부터 틈틈이 익힌 태권도가 4단이었지만 무력했습니다.

대문 밖에서 발소리만 나도 혹시 소리가 새나가랴 아내는 어린 딸의 입을 막고 방으로 피하기를 거듭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마루에서 놀던 아이가 안방으로 들어오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는 피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를 숨기고 피할수록 공포감에 더욱 시달렸습니다. 목숨을 던지고 두려움에 맞서야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임 씨는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가족은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답니다. 나가서 강하게 맞섰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충돌도 있었지만 임 씨를 해할 명분이 부족한 그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칼 앞에서 주먹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낀 임 씨는 그때 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우리나라 전통검도를 한다는 검도단체를 알게 됐습니다. 아예 그 단체 소속으로 공주에 도장을 차렸습니다. 사업도 추스르며 단체에서 파견한 사범에게 일주일에 두세 차례 검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한 기술개발자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1996년 공장은 망하고 도장도 문을 닫습니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와서는 단체의 대표에게 매달렸습니다. 임 씨는 무보수로 단체의 여러 업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이자 스승이기도 한 그분은 임 씨를 가엽게 여겼는지 직접 기술을 전수해줬습니다.

검도가 아닌 검법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보증을 서준 개발자에게서 양도받은 기술특허가 효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콘택트렌즈를 초음파로 세척하는 신기술이었는데 투자자도 생겼습니다. 임 씨는 당시 붐이던 벤처기업을 세우고 제품을 만듭니다. 2000년에는 방송뉴스에도 나왔습니다. 이후 빛으로 충전하는 휴대전화 기술, 틀니와 치과용 석션(흡입)기계를 초음파로 세척하는 기술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희한하게도 먹고살 만해지면서 검도에 더 빠지게 됐습니다. 이 땅에서 1000년 넘게 이어온 본국검법(本國劍法)과 조선세법(朝鮮勢法)을 스승에게서 배우는데 왠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조 때 각종 무예를 정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직접 읽으며 수련했습니다. 공주유림(儒林) 회장을 지낸 부친에게서 대학 때까지 익힌 한문 실력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참, 그는 대학 시절엔 방학 때마다 고향의 향교에서 ‘논어’와 ‘맹자’를 익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무예도보통지를 공부한 지 7년여, 임 씨는 기존 검도계에서 본국검법 33세(勢·자세)를 익혔다며 실연해 보일 때 왜 이질감이 느껴졌는지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 고유의 자세와 동작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는 이제 나름대로 완벽하게 무예도보통지에 그림과 글로 설명된 본국검법을 실연할 수 있게 됐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우리 ‘칼 쓰는 법’이 죽도(竹刀)를 사용하는 경기용 검도와 다른, 검법(劍法)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세계일보에 한국의 무예를 기록한 글 ‘무맥(武脈)’을 연재한 무예평론가 박정진 씨는 임 씨의 본국검법 실연을 보고 “옛것을 가장 제대로 복원한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그의 본국검법이 실질적이고 실전적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보법(步法·발을 옮기는 법)을 보이기 때문이랍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무예계에서는 스승이 직접 가르치지 않은 기술을 제자가 쓸 수 없습니다. 심하면 파문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임 씨의 스승은 2009년 고국을 떠나며 임 씨에게 단체를 맡을 의향을 물었습니다. 이제 좀 벌이가 되는 사업을 접을지 한동안 고민하던 임 씨는 민족의 혼이 담긴 칼에 매진하기로 했습니다. 임 씨는 곧 대한검법협회를 발족합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