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기자의 망연자실]해무에 숨은 인간들, 결국 ‘광기의 이빨’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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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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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무’ ★★★☆

망망대해에 고립된 어선을 형상화한 대형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연극 ‘해무’. 어눌해 보여도 할 말은 다하고 마는 배우 송새벽 씨(뒷모습)의 독특한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극단 연우무대 제공
망망대해에 고립된 어선을 형상화한 대형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연극 ‘해무’. 어눌해 보여도 할 말은 다하고 마는 배우 송새벽 씨(뒷모습)의 독특한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극단 연우무대 제공
저주를 받아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떠도는 배. 무수한 해양소설의 소재다. 호머의 ‘오디세이아’부터 바그너의 가극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까지.

연극 ‘해무’(김민정 작, 안경모 연출)는 그런 ‘저주받은 배’의 서사를 사실주의 수법으로 풀어냈다. 해무(海霧)는 바다에 짙게 끼는 안개를 말한다. 바다 한복판에서 해무를 만나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연극은 이를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길을 잃는 공포’로 그려낸다.

연극은 그 공포를 실화로부터 길어 올린다. 2001년 밀입국자를 태우고 여수로 들어오던 어선 태창호의 어창(魚艙) 환기구가 막히는 바람에 그 안에 타고 있던 중국인과 조선족이 대거 질식사한 사건이다.

선장을 포함해 여섯 명의 선원을 태우고 고기잡이에 나선 전진호는 빚더미란 풍랑에 흔들리는 어선이다. 마지막 희망으로 만선의 부푼 꿈을 안고 출항했지만 어망에 걸린 것은 시퍼런 절망뿐. 그때 서해상에 떠 있는 중국 배에 타고 있는 조선족 30명을 텅 빈 어창에 싣고 한국으로 밀항시켜 주면 그 빚을 탕감하고도 남을 돈을 주겠다는, 펄떡이는 제안을 받게 된다.

임금은커녕 일터까지 잃게 된 어부들은 이를 운명의 도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거친 풍랑을 헤치며 해경의 추적을 따돌리다가 환기구가 막혀 갑판 아래 어창에 있던 조선족들이 기관실에 있던 한 명의 여인을 제외하곤 모두 죽어버린다.

여기서 연극은 현실보다 더 깊은 곳을 파고든다. 코앞에 닥친 화를 면하기 위해 반인륜적 범죄를 또 저지른다. 하지만 죄의식은 죄보다 더 무서운 법. 짙은 해무에 갇힌 채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들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절망과 도박, 극한의 한계상황을 거쳐 광기로 치닫는 드라마를 든든히 받쳐주는 것은 어선을 형상화한 대형 무대다. 2007년 극단 연우무대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소극장에 오를 때는 가오리 수준이었던 무대는 점차 커져 이제는 대극장 무대를 꽉 채울 고래가 됐다.

이 ‘고래’는 공연 내내 자맥질을 펼치면서 망망대해에 고립된 갑판 위의 막막함, 얽히고설킨 신경전이 펼쳐지는 그 아래층 선실의 팽팽함, 절박한 사랑 앞에 목 놓아 우는 기관실의 애절함을 다양한 앵글로 담아낸다. 질펀한 사투리 섞인 거친 입담으로 무장했지만 작은 신경전에도 폭발하고 마는 뱃사람들의 어눌한 심성을 그려낸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칭찬할 만하다. 특히 최고참 선원 신철진 씨와 막내 선원 역의 송새벽 씨의 연기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사실적 음향과 음악에 집착해 배우들의 대사가 종종 묻혀버리는 점은 아쉽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해무가 엄습한 뒤 선원들이 죄의식에 눈떠가는 과정을 사건 사고 중심으로 외형화하는 데 머물고 만 점이다. 연극 속 해무를 하늘이 준 벌이나 억울한 원혼의 저주로 그려내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원유로 바꾸는 영혼의 연금술이 더해졌더라면….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0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3만∼5만 원. 02-3668-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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