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눈물 속의 기념식…여성가장들 희망의 끈을 잡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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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가게 100호점 개업하던 날

“지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의 소원은 빨리 커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것이었어요.”

“아이를 낳고 3개월 후부터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도,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 행사 진행 요원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루 종일 장맛비가 내린 지난달 29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암갤러리에서 여성 가장들을 위한 ‘희망가게’ 100호점 개업 기념식이 열렸다.

희망가게는 생계가 어려운 여성 가장들에게 창업 자금을 대출해주는 마이크로 금융 프로그램(상자기사 참조). 아름다운재단이 가구당 최고 4000만 원을 연리 2%에 융자해 준다. 희망가게는 2003년 고(故)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유족들이 기부한 50억 원으로 출발했다.

○ 만물상 하며 5남매 키운 어머니

이날 행사는 희망가게 100호 개업을 기념한 사진작가 조선희 씨의 전시회(‘희망가게, 두 개의 상像’)와 함께 열렸다. 조 씨는 광고와 연예 분야에서 손꼽히는 사진작가다. ‘연예인이 가장 선호하는 사진가’로도 불린다. 그는 4월 17일부터 전시회 직전까지 70여 일 동안 전국에 있는 희망가게 여사장 29명의 사진을 찍었다. 기념식 4번째 연사로 그가 앞으로 나섰다.

“대구에서 첫 촬영을 하고 두 번째인가 세 번째였던 것 같아요.”

갑자기 그가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잡고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 셋과 할머니가 계시는 미용실이었어요. 순간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조 씨의 어머니는 그가 중학교 1학년일 때 혼자 몸이 됐다. 마흔둘, 지금의 그보다 딱 한 살이 많을 때였다. 어머니는 경북 왜관 시장에서 만물상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저도 한부모가정에서 컸거든요. 25년 동안 장사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어요. 저희 집에선 양말부터 속옷, 물엿까지 안 파는 게 없었어요. 하지만 처음엔 프로젝트를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전국을 다 돌아다녀야 하는 데다, 또 한번 하면 잘해야 하잖아요. 심적인 부담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일하는 여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이런 일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을 찍다 보니 열정에 더 불이 붙었다. 그는 다른 스케줄을 거의 미뤄둘 만큼 희망가게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세상에 맞서 가족을 지키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찍었던 두 사람의 사진을 다시 촬영했다. ‘너무 예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부모가정 출신이다 보니 희망가게 여사장들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희망가게는 싱글맘의 인생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삶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더 긍정적이고 큰 사람이 되게 돕는 것이죠.”

조 씨의 말은 우연히도 잠시 후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인 윤정숙 씨에 의해 추가로 설명됐다. 윤 씨는 ‘가난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미국의 보건 행정가 헬렌 게일 씨의 말을 인용했다. 여성 가장이 빈곤의 중심에 있다는 뜻이다. 여성 한부모가정의 아동 빈곤율은 평균의 3배, 소득은 남성 가구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희망가게 프로젝트가 생긴 이유다. 게일 씨는 “가난은 여성의 얼굴에만 새겨지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녀들에게도 낡은 옷처럼 대물림된다”고 지적했었다.

○ 희망가게 89호 미용실의 사연

문현정 씨는 광주 광산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 조선희 씨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문 씨다. 그는 2009년 남편 사업 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음주, 외도로 가정불화가 생겨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24개월인 막내가 태어난 직후였다. 남편은 이혼판결이 나기도 전에 전셋돈을 빼갔다. 문 씨와 갓난아기, 지금은 초등학생, 중학생인 두 딸은 갈 곳이 없었다. 수중에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과거를 정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모든 것을 내줬기 때문이었다. 문 씨가 운영하던 미용실을 처분한 돈은 이미 남편의 사업 밑천으로 들어간 후였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10월 말인가, 11월 초 즈음이었다. 보다 못한 스리랑카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고향에 보내려고 모은 ‘피 같은 돈’ 500만 원을 빌려줬다. 예전에 몸을 다쳤을 때 문 씨가 큰 도움을 준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네 모녀는 그 돈으로 몸을 누일 거처를 마련했다.

미용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던 그에게 희망의 빛이 다가왔다. 복지관 직원이 희망가게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당장 신청을 해서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과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초 희망가게 89호인 미용실을 열었다.

중학생 큰딸은 엄마를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딸은 기말고사를 빠지고 희망가게 행사에 오려고 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려면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실력이 아깝다는 담임선생님의 만류로 엄마와 딸들(중학생 큰딸과 초등학생 둘째 딸)은 난생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표는 할부로 끊었다.

“장사는 잘되세요”란 기자의 질문에 문 씨는 “우리 동네에만 미용실이 10곳이나 돼요. 단골들 덕분에 그냥저냥 유지는 하죠”라고 답했다. 그의 미용실은 세 딸과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됐지만, 문 씨는 어머니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의 어머니는 딸의 이혼 소식을 듣고 쓰러진 후 치매를 앓고 있다. 모든 기억이 쓰러진 그날을 기점으로 멈췄다.

“미용실로 돈을 벌어 얼마 전에 중고차를 샀어요. 쉬는 날이면 어머니랑 김밥 두 줄을 사서 짧은 여행을 갑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죄송하지만 이젠 어머니의 치매가 남은 시간 동안 효도하라는 뜻인 것 같아요.”

어머니가 7월부터 데이케어 센터에 나간다며 기뻐하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구경이나 하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서울 지리를 몰라서…”란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 날 전화를 하니 기차 시간 때문에 제대로 구경을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서울 나들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제겐 큰 힘이 됩니다. 희망가게는 어두운 터널 속에 있던 제게 새로운 빛을 주었고요. 이젠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습니다. 저와 같은 여성들에게 희망가게가 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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