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나는 아직 낙산사…’로 공초문학상 받은 정호승 시인 복원 공사 주도 정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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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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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 화재 났을 때, 내 詩도 무너져…”

주지 스님의 소임을 내려놓고도 복원 불사를 주도하고 있는 낙산사 한주 정념 스님(왼쪽)과 정호승 시인이 10일 의상대 옆에서 낙산사의 미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뒤편의 나무는 사진작가들이 국내에서 가장 ‘잘생긴’ 것으로 꼽는 의상대 소나무로 화재의 후유증을 앓고 있어 특별히 보호받고 있다. 양양=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주지 스님의 소임을 내려놓고도 복원 불사를 주도하고 있는 낙산사 한주 정념 스님(왼쪽)과 정호승 시인이 10일 의상대 옆에서 낙산사의 미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뒤편의 나무는 사진작가들이 국내에서 가장 ‘잘생긴’ 것으로 꼽는 의상대 소나무로 화재의 후유증을 앓고 있어 특별히 보호받고 있다. 양양=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중략)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시집 ‘밥값’에 실린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로 이달 초 공초문학상을 수상한 정호승 시인(61)은 이렇게 노래했다.

2005년 4월 5일 강원 양양 낙산사.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은 화마(火魔)에 휩싸여 동종은 녹아내렸고, 원통보전은 한 줌 재로 사라졌다. 정념 스님(49·조계종 낙산사 한주 겸 종책 특보단장)이 주지로 취임한 뒤 보름 만에 발생한 불이었다. 스님은 혼신을 다한 6년간의 성공적인 복원 사업으로 최근 종정 표창을 받았다.

전생(前生)에 ‘골백번’ 낙산사와 인연이 있을 법한 두 사람에게 문득 전화를 걸었다. “낙산사에 가시지요”라고. 다행히 시인도 스님도 흔쾌히 받아들여 10일 낙산사 가는 동행이 됐다. 낙산사 초입의 홍예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인은 “아, TV를 통해 처참한 모습을 봤는데…. 이제는 반듯하네”라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홍예문 앞에는 당시 화재 중 타다 남은 범종의 잔해와 시커먼 잔목들을 전시하는 산불재난 체험장이 있다. 스님은 “아무리 복원을 잘해도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산다”면서 “체험장은 자신들의 업(業)을 잊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화재 뒤 낙산사는 단원 김홍도가 18세기에 그린 낙산사도(洛山寺圖)에 따라 복원해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절집 살림의 필요에 따라 불균형하게 들어섰던 전각 일부를 옮기고, 홍예문∼범종각∼사천왕문∼빈일루∼응향각∼원통보전에 이르는 중심 길을 반듯하게 세웠다. 어느 전각에서 바라보든지 설악산 대청봉과 동해가 시원하게 보이도록 전각들의 키를 맞췄다.

시인은 두 종이 들어선 범종각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처참하게 녹아내려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낙산사 동종(보물 제479호)을 복원한 것이다. 시인은 타종이 가능한 앞의 종을 직접 울린 뒤 입을 뗐다.

“종과 종메(종을 치는 나무)는 떼려야 뗄 수 없죠. 어른들을 위한 동화 ‘종메’를 쓰기도 했어요. 종메의 자극이라는 고통이 없으면 종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시의 마지막에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찻잔을 마주한 뒤 미처 못 다한, 낙산사와 마음의 불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았다.

“낙산사에 여러 차례 올 기회가 있었죠. 20대에는 의상대에서 바다를 보며 꿈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느꼈고, 30대 중반에는 눈 덮인 낙산사의 평화로움을, 50대에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했다는 홍련암에서 간절한 기도의 의미를 찾았어요. 낙산사가 무너져 내릴 때 내 삶도, 내 시도 함께 무너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낙산사는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내 삶에 대한 은유적인 시어이자 화두였습니다.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 다시 가겠다는 역설적인 의지죠.”(시인)

“주지 되고 보름 만에 큰 화를 당하자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불이 치밀더군요. 그러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원불사는 도저히 남 탓과 원망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스님)

스님은 새로 들어선 원통보전에 이르자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이곳 몇 미터 깊이에 건물의 안전을 기원하는 지진구(地鎭具)를 묻었다고 했다.

“지진구에 설계도와 건물에 얽힌 기록들, 신권과 구권, 금 2kg을 넣었습니다. 천년이 흘러도 열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세월이 무상해서 열리면 금은 꼭 복원을 위한 불사에 쓰라는 당부도 있습니다.”

해수관음상과 의상대, 홍련암을 둘러본 뒤 시인과 스님은 종교를 뛰어넘는 마음의 공명을 느꼈다. 사실 시인은 세례명이 프란치스코로 가톨릭 신자다.

“큰 화를 겪고 나서 낙산사에 사람 다니는 길뿐 아니라 마음의 길, 바람의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내년 3차에 걸친 복원이 끝나도 100년, 200년 뒤 낙산사를 받쳐줄 나무를 심으며 살고 싶습니다.”(스님)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한때 제가 시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화를 냈죠.(웃음) 그러다 몇 해 전 운주사(전남 화순)의 얼굴 형체도 제대로 없는 와불을 보면서 큰 느낌을 얻었는데, 이제 다시 낙산사에서 두고 온 마음을 찾고 갑니다.”(시인)

양양=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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