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사림파 학문기반 제공 ‘잊혀진 巨儒’ 류숭조의 재발견

  • Array
  • 입력 2011년 4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 내일 국학진흥원 학술대회

진일재 류숭조 선생의 문집.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진일재 류숭조 선생의 문집.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조선 초기 성리학은 이른바 관학파가 주도했다. 정도전 권근으로 대표되는 관학파는 왕실과 협력해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학파는 특권화됐고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 왕조의 이념인 유학을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사림파가 등장했다. 관학파에서 사림파로 조선의 지성사가 옮겨가는 시대를 살았던 류숭조(柳崇祖·1452∼1512)는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사림 세력의 사상과 이념을 기초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류숭조는 ‘도통(道統)계열(유학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계열)’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도통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진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이 류숭조의 사상을 조명하는 ‘조선 전기 사림과 성리학’ 학술대회를 29일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연다. 사실상 성리학자 류숭조 한 사람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로, 특정 유학자에 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류숭조는 당대에는 높은 성리학적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16세기 초 김종직의 문인인 목계 강혼(1464∼1519)은 류숭조에 대해 “도학(유교의 도덕에 관한 학문)의 연원을 누가 능히 발양했던가. 권양촌(권근) 이후 오직 공(류숭조) 한 사람이었네.… 사문(斯文·유학계)에서 의지하는 바였고 경연(임금이 강론하며 신하와 국정을 논하던 일)에서는 스승 노릇했네”라고 썼다.

학술대회에서 ‘진일재 성리설의 본질과 사상사적 의의’를 발표하는 김종석 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장은 “성균관 시절 저술한 ‘대학십잠’과 ‘성리연원촬요’에서 류숭조는 도학정치 확립을 위한 학문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을 시대적 사명으로 삼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류숭조는 조선 왕조가 설정한 유교정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치 방식부터 왕도정치의 이념에 맞아야 한다며 그것은 훈척신에 의존한 정치가 아니라 임금의 철저한 자기 수양에 기초를 둔 수기치인의 통치라고 주창했다. 이는 바로 사림파의 철학사상이기도 하다.

관학파에서 사림파로 옮겨가는 전환기에 살았던 류숭조는 성균관을 통해 학문적으로 성장했고 평생을 관직에서 보냈다는 점에서 관학파 학자와 닮았지만 연산군의 실정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투옥 유배, 군주에게 유교적 정치이념의 이상을 지속적으로 주입시킨 점 등에서는 사림파의 특성을 보였다.

한국 사상사에서 15세기 유학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으로 저조했던 이유는 곧 류숭조에 대한 평가 소홀과 직결돼 있다. 이른바 ‘도통론’이 등장한 것은 중종 5년(1510년)과 9년(1514년). 당시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 세력은 훈척신 및 관학파와의 대립에서 이념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성격이 짙은 도통계열을 내세웠다. 이 계열은 학문적 실체는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의정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류숭조의 경우 정치적으로 절의를 내세울 만한 행적이 없다는 이유로 도통계열에 회자되지 않음으로써 그의 학문적 성과가 가려졌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김 실장은 “퇴계 이황의 성리학적 업적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15세기 사림의 성리학적 기초를 닦은 류숭조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류숭조는 조선 전기 유학 사상사를 잇는 주요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