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낙서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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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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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호롱불이 있는 마을-한희원 그림 제공 포털아트
별과 호롱불이 있는 마을-한희원 그림 제공 포털아트
어느 날 아침 조용한 시골마을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동네 담벼락과 주택의 벽면에 ‘최○미’라는 여자 이름이 수도 없이 씌어 있었습니다. 어떤 상사병 환자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 이름을 써놓은 모양이라며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찼습니다. 귀찮고 짜증스럽지만 낙서가 미관을 해치니 그것을 지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과 걸레로 낙서를 지우며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마을은 다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누군가가 밤사이에 전날과 똑같이 ‘최○미’라는 이름을 곳곳에 써두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개중에는 극도로 분개하며 이런 놈은 기필코 잡아 콩밥을 먹여야 한다며 당장 경찰에 신고하자고 나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로 경찰에 신고하는 건 지나치다는 신중론이 많아 다시 한 번 낙서를 지우고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의 노고를 비웃듯 벽 낙서는 고스란히 되살아나 있었습니다. 결국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고 사건이 접수되어 본격적으로 낙서범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사람은 낙서를 지우고 담당순경은 잠복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마침내 담당순경은 문제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낙서범은 어이없게도 여덟 살 된 남자아이였습니다.

담당순경은 아이를 지구대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낙서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엄마의 이름을 많이 불러주면 병이 빨리 낫는다고 해서….” 아이는 엄마의 지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밤마다 동네를 돌며 낙서를 했습니다. 순경과 지구대로 찾아온 마을 주민 모두 콧등이 찡해지고 눈두덩이 욱신거려 도무지 아이를 나무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순경과 마을 주민은 아이에게 학용품을 선물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어린 낙서범은 한없이 각박하고 삭막해진 세상에 커다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패륜의 세태에 진흙 속에서 고결하게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을 발견한 기분입니다. 때 묻지 않은 동심, 낙서하는 아이의 마음에서 우리는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다시 발견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선한 마음을 타고났다고 보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영어 단어는 ‘response(반응)+ability(할 수 있음)’의 조합입니다. 반응할 수 있음,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책임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너무 무책임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외면하고 도외시하는 삶, 나만 잘살고자 하는 이기의 극점에서 스스로 고통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린 낙서범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 그것은 곧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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