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쏟아져 나온 詩…선물 받은 것 같더이다”

  • Array
  • 입력 2010년 8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네 번째 시집 ‘저녁’ 펴낸 송기원 씨

“죽음의 공포도 정면으로 맞서니 자유로워지네요”

시집 ‘저녁’에서 죽음을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서로 끌어안는 모습으로 노래한 송기원 씨.그는 “올봄 학교를 그만두면서 자유로워지고 죽음에 대한 감각이 열려 그렇게 많은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시집 ‘저녁’에서 죽음을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서로 끌어안는 모습으로 노래한 송기원 씨.그는 “올봄 학교를 그만두면서 자유로워지고 죽음에 대한 감각이 열려 그렇게 많은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시인 송기원 씨(63)와의 18일 점심식사 자리는 저녁처럼 흥이 흘렀다. 점심 약속이 사무적인 만남이기 쉽다면, 저녁은 속내가 풀리는 자리이기 쉽다. 준비한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성실한 답변을 쏟아내다가도, 송 씨는 “아, 이제 마음잡고 주색잡기 해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 진지한 표정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사람이 정말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시집 ‘저녁’(실천문학사)을 낸 시인인가.

‘가령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깊은 골짜기에서, 내가/시체로 누워 있다고 하자.’로 시작되는 시 ‘육탈(肉脫)’은 내용으로만 보면 잔혹 시다. 굶주린 독수리가 시체를 먹어치우고, 남은 데엔 파리가 구더기를 키우고, 진물은 나무의 양분이 된다. 그런데 추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낡은 육신은 종내 이렇게 화한다. ‘가령 봄에는 꽃비가, 가을에는 낙엽이/하얀 빛을 포근하게 덮는다고 하자./가령 평생을 꾸정모기로 그악스럽던 내가/처음으로 부드러운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하자.’ 죽음이 삶과 화합하는 장면을 붙잡아 내는 시인의 감각이란!

“초기 시로 돌아간 것 같아요. 퇴폐적이고 위악적인…. 죽음에 대한 생각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공포의 대상이니 쳐다보고 싶지 않은 것. 그런데 그런 게 아닙디다. 내 안에 죽음에 대한 감각이 오래전부터 녹아 있었어요. 그걸 정면으로 맞서니 자유로워져요.”

첫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년)의 날 선 감각이 네 번째 시집에 살아 있다는 얘기다. 소설가로는 활발하게 활동해온 그이지만, 시는 과작이었다. 그런 그가 올봄 소설을 쓰고자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 머물 때 뜻밖에도 시가 쏟아져 나왔다. 시집에 실린 65편 중 58편의 시가 그때 쓰였다. “(시는) 더 못 쓸 줄 알았더니…선물 받은 것 같더이다.”

‘주인아낙네가 장다리 텃밭에서 하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장다리 꽃대 아래 시들어서 누렇게 시래기가 된 이파리만을 따주는 것이었다. 단 한 잎이라도 생생한 잎은 건드리지 않은 채 시든 이파리만 따는 주인아낙네의 행동이 나에게는 무슨 종교적인 의례처럼 경건하여서, 이를테면 장다리의 삶은 건들지 않고 장다리의 죽음만 치워주는 무슨 장례식 같기도 했다.’ 그 장례식의 비밀은 ‘춥고 긴 극빈의 겨우살이에 필요한 시래기를 한 잎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서 모든 푸성귀를 키울 수 있는 한껏 장다리로 키운 것이었다’. 장다리의 장례식은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였음을 발견한 시인. 죽음은 이렇게 삶과 어우러진다.

젊은 날 건달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문학으로 구원받고, 1980년대 격렬한 사회운동을 지나서 1990년대에는 인도와 히말라야를 다니면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이제 죽음을 성찰한다.

“문구 형님(소설가 이문구)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내가 그랬어요. 옛날로 치자면 형님도 오래 살았다고. 그런데 내가 문구 형님 죽은 나이를 훌쩍 지났어요. 그 생각을 하니….”

시 ‘옛날’에서 그는 이 얘기를 시로 적으면서 ‘옛날을 혀끝에 올리려니/참혹해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목숨이여’라고 뇐다.

1980년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할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돌뱅이 모자로 떠돌이 생활을 함께했던 어머니다. 그 어머니의 뼛가루를 뿌린 흙을 디자이너 안상수 씨가 떠다가, 그 흙 빛깔과 가장 비슷한 색을 낸 게 시집 표지가 됐다. “아마 마지막 시집이 될 것 같아요. 죽음 얘기가 이렇게 쏟아지니 (시가) 더 나올 것 같지 않아서….”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