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극악한 독재정권 무너졌는데…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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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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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헤르타 뮐러 지음/368쪽·1만3000원/문학동네

바닥에 깔린 여우 모피 카펫의 오른쪽 뒷발이 잘렸다. 잘린 발이 여우의 배 위에 놓였다. 아디나의 집에 비밀경찰이 다녀간 것이다.

교사인 아디나는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 학생을 토마토 수확작업에 동원한 것은 미성년자 노동 착취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비밀경찰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다. 여우의 사지를 하나씩 절단하는 것으로 아디나가 비밀경찰의 손아귀 안에 있음을 고지한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사진)가 장편소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서 다루는 시대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막바지다. 쇠락한 도시에서 앞날에 대해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채 그저 피로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사회적 실험’이라는 사회주의체제 정부가 약속했던 현실이다.

뮐러는 이 암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신 암울한 분위기의 시적인 문장들로 이어간다. ‘개미 대가리는 핀처럼 뾰족해서 태양은 빛을 내려 쏠 자리를 찾지 못한다. 태양이 작열한다. 개미는 길을 잃는다. 개미는 기어가고 있지만 살아 있지 않다.’ 개미뿐일까. 아디나의 목을 긋는 듯한 포플러나무의 잎사귀도, 텅 빈 하늘의 햇빛도 싱싱한 생명력이 없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오랜 친구 클라라의 애인이 비밀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클라라와 서먹해지는 아디나. 그러나 차우셰스쿠 정권이 집단 체포를 계획하고 있다고 아디나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클라라다. 모든 감정을 빼고 움직임만을 적어 넣는 뮐러의 묘사는 오히려 서늘하면서도 애틋하다.

‘메모지 한 장이 현관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디나가 읽는다. 사람들이 체포될 거야 리스트가 있어 넌 숨어야만 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널 찾지 못할 거야 이웃집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계단에서 클라라의 하이힐 소리가 똑똑 울린다. 아디나는 발끝으로 메모지를 문틈에서 끌어당긴다.’

아디나가 도피하는 것은 여우의 머리가 잘리기 직전이다. 이야기는 정권 붕괴라는 혁명적 사건과 독재자의 몰락 뒤에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작가가 가장 전달하고 싶었을 메시지가 응축된 묘사로 맺어진다.

이 작품은 작가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됐다. 비밀경찰로부터 스파이 역할을 제의받았던 뮐러는 제의를 거부했다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이후 비밀경찰의 감시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제목은 루마니아 속담에서 가져온 것으로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뮐러는 서울에서 열리는 ‘2010 세계비교문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5일 처음 방한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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