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의 향기]소수자 배제하는 국가주권… 인권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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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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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권의 너머에서/우카이 사토시 지음·신지영 옮김/416쪽·2만2000원·그린비

외국인(外國人)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옳은가. 팔레스타인인(人)을 지칭할 때 외국인은 적합하지 않다. 팔레스타인은 국가라는 정체(政體)를 갖고 있지 않은데 외국인이라는 단어는 국가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라는 단어는 국가 안, 혹은 국가 간에 존재하는 소수자를 배제하는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 국적 없는 테러집단과의 전쟁, 국경이 무의미한 인터넷과 금융시장…. 21세기의 다양한 사건과 현상은 국가,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이 갖는 이 균열을 점점 더 크게, 혹은 점점 더 눈에 잘 띄도록 만들고 있다.

저자는 프랑스문학과 사상을 전공하고 오키나와, 팔레스타인, 대만 등 세계의 정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일본 학자다. 그는 니체, 에르네스트 르낭, 자크 데리다 등 여러 철학자의 논의를 통해 근대 유럽의 국가주권 개념 형성 과정을 고찰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주권 개념의 균열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추적해간다.

프랑스 사상가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국가의 성립이 망각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여러 지역이 한 국가로 통일되기 위해서는 그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지역 간 갈등 혹은 내전의 기억을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는 소수자를 배제하고 망각하며 완성되는 셈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전쟁 중 발생한 책임을 무시하고 망각하려 하는 것은 그 피해자들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망각의 기제는 국민 혹은 국가를 완성하기 위해서만 기능할까. “국민이 깊이 자기를 망각하고 외국인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날을 꿈꾸어 본다면…”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망각이 국가 주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주권을 완성하기 위해 작용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2001년 9·11테러는 국적 없는 테러세력의 등장을 통해 21세기 들어 급속히 진행된 주권개념의 균열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저자는 ‘테러와의 전쟁’으로는 국경 없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죽음의 문화’의 피안을 추구하는 생명 앞에서의 평등”을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1년 9·11테러는 국적 없는 테러세력의 등장을 통해 21세기 들어 급속히 진행된 주권개념의 균열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저자는 ‘테러와의 전쟁’으로는 국경 없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죽음의 문화’의 피안을 추구하는 생명 앞에서의 평등”을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저자가 제시하는 환대(歡待)의 사유도 이 가능성을 보여준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환대라는 것은 외국인이 타국 땅에 발을 디뎠다는 이유만으로 그 국가 사람들로부터 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라며 이를 모든 인간의 기본권으로 정의한 바 있다.

저자는 환대를 뜻하는 영어 ‘hospitality’의 어원인 라틴어 ‘hospes’가 주인과 손님 양쪽을 모두 지칭한다는 데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공간의 주인은 그 공간에 가장 먼저 손님으로 도착한 이다. 주인이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권리, 즉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공간에 새로 객(客)이 도착해야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단일민족 국가로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배제가 뿌리 깊은 일본 사회가 진정한 주권을 획득하는 때는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객을 환대할 때라는 것이다. 이때의 주권은 타자를 배제하는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개별 주체를 위한 보편적 권리다.

책은 1995∼2006년 신문이나 잡지에 저자가 기고한 글을 엮은 것으로 9·11테러 등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본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법제화했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저자가 언급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국가주권이 균열하고 있는 만큼 이를 되돌리기 위한 반동 역시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 같은 상황에서 폐쇄적 공동체 윤리와 정치를 극복하고 국가 주권 너머 인간의 주권을 발견하기를 촉구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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