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보리가 황금색 띨 때…‘보리 보리은어 보리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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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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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보리밭.
출렁이는 보리밭.
‘보리쌀 씻는 물에/구름을 담아 쓱쓱 씻어낸다//희디희게 일어서는/뭉게구름,/보리쌀 뜨물이 은하수를 만든다//질박하게 놓이는/댓돌 딛고 앉아/재진 보리밥 찬물에 말아/한 숟갈 입에 넣으니//청보리,/엄동을 뚫고 살아오는 듯/오소소 퍼지는 겨울 냄새//댄 여름,/무딘 뱃속에 시원한/궁전을 짓는구나’ <박종영의 ‘보리밥’에서>

보리누름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때’란 말이다. 보리(barley)는 쌀보리와 겉보리가 있다. 쌀보리는 껍질이 씨알에서 잘 떨어지는 것이고, 겉보리는 껍질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쌀보리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논 그루갈이로 재배한다. 방아를 찧으면 알이 둥글 매끈하고 하얗다. 우리가 주로 보리밥을 해먹는 게 바로 이것이다. 추위에 약해 대전 위쪽 지방에선 힘들다.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겉보리는 쌀보리보다 훨씬 더 꺼끌꺼끌하다. 방아를 찧어도 알이 길쭉하고 거무스레한 빛을 띤다. 주로 경북을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재배한다. 밥을 하기 전, 한 번 더 삶은 뒤 쌀과 섞어 지으면, 쌀보리보다 구수한 맛이 난다. 겉보리는 쌀보리보다 추위에 강하다. 기원전 5∼6세기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가을보리와 봄보리도 있다. 가을보리는 가을에 씨 뿌리고, 봄보리는 봄에 파종한다. 우리나라는 겨울보리가 대부분이지만, 날씨가 추운 강원 경기북부 중부산간지대는 봄보리를 재배한다.

노란 송홧가루가 날리고, 들판에 자운영 꽃이 숯불처럼 달아오르면, 음식 맛도 절정으로 치솟는다. 나뭇잎이 연두색에서 짙은 초록으로 변할 때, 모든 생물은 그 생명의 기운이 용솟음친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먹고 산다. 꼬리에 꼬리 물듯, 모든 생물은 서로 그물코처럼 얽혀있다. 가장 생명력이 강할 때가 가장 영양이 많을 때이다.

보리가 황금색을 띨 때면 모든 것이 맛이 있다. 보리은어가 그렇고, 보리숭어가 또한 그렇다. 이런 것들은 보리이삭이 팰 때 먹어야 제맛이 난다. 그래서 이름 앞에 ‘보리’가 붙었다.

섬진강 보리은어는 수박냄새가 난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강바닥 자갈의 초록 물이끼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보리은어는 초록이끼를 먹고, 푸른 이끼 똥을 눈다.

섬진강은 낙동강 영산강과는 달리, ‘정관수술’을 하지 않았다. 하굿둑이 없다. 은어는 아무 막힘없이 물이끼를 먹으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보리은어는 길이가 10cm 안팎이다. 뼈도 부드럽다. 그대로 초고추장에 찍어 날로 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은어는 한여름이 되면 구워 먹어야 한다. 뼈가 굵은 데다, 비린내가 나서 날로는 못 먹는다.

보리숭어는 보리 팰 때 잡히는 개숭어를 말한다. 개숭어는 동해안이나 남해안에서 잡히는 숭어다. 서해안에서 잡히는 참숭어는 겨울에 먹어야 진짜 맛이 난다. 참숭어는 머리가 날씬하고, 꼬리지느러미가 갈라져 있다. 눈동자 주위에 노란 둥근 테가 있다. 개숭어는 꼬리지느러미가 밋밋하고, 크기도 참숭어보다 크다. 눈동자 주위에 노란 테도 없다.

요즘 남해안의 거제 통영 여수 순천 강진 완도 해남이나 섬 갯바위에서 낚는 고기가 주로 보리숭어(개숭어)이다. 울둘목(해남∼진도 사이 좁은 해협)에서 뜰채로 잡는 숭어도 개숭어다. 숭어는 힘이 세다. 울둘목의 그 거센 조류를 힘차게 점프해 거슬러 올라간다. 망둥이가 아무리 뛰어봐야 숭어를 따라갈 수 없다.

보리새우도 있다. 보리새우는 보리 팰 때 잡히는 새우인가? 아니다. 보리새우는 그 자체가 이름이다. 호랑이 줄무늬처럼 몸에 가로줄이 나있는 새우다. 꼬리의 진한 노란색이 누런 보리색깔과 흡사하다. 그래서 보리새우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일본말인 ‘오도리(踊)’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오도리는 ‘뛰어오르다, 춤을 추다’는 뜻이다. 보리새우가 막 잡혔을 때, 펄떡펄떡 뛰어오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먹는 보리새우는 대부분 양식을 한 것이다.

보리굴비는 왜 보리굴비일까? 굴비는 한겨울 전남 영광에서 바닷바람에 말린 게 으뜸이다.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해서 건조시킨다. 건조과정은 봄에 끝나지만, 그 다음 보관이 문제다. 보리굴비는 말린 굴비를 서늘한 통보리 속에 몇 달씩 숙성시킨 것이다. 참조기만 쓴다. 살이 쫄깃쫄깃하고 차지며 달다. 보리굴비를 두들겨 찢어서 고추장에 묻었다 먹으면,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른다.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다.

‘보리∼’가 붙어 있는 단어는 약간 ‘모자라다’는 뜻이 들어있다. 낮춰보거나 업신여기는 뉘앙스가 물씬 난다. ‘보리바둑을 둔다’는 것은 ‘정석도 모른 채 마구 두는 바둑’을 뜻한다. 요즘 말로 하면 ‘논두렁바둑’이다. ‘보리장기, 보리윷’도 마찬가지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거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서의 ‘겉보리’ ‘보릿자루’도 아주 하찮은 것을 의미한다.

‘보리동지’는 옛날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사람’을 놀리는 말이다. ‘조금 둔하거나 숫된 사람’을 보리동지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보리저녁’은 무슨 뜻일까. 해가 지기 전의 이른 저녁을 말한다. 보리밥을 하려면 밥을 안치기 전에 보리쌀을 한 번 더 삶아야 한다. 그만큼 일찍 서둘러야 제때에 맞출 수 있다.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짝지근한 보리밥이다/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금이 가고 이가 빠진 황톳빛 툭사발을/끼니마다 가득 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파리 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흙 묻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 <김준태의 ‘보리밥’에서>
벼는 양(陽)이요, 보리는 음(陰)이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보리는 익어도 빳빳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 식품학자 유태종 박사는 “벼는 양이기 때문에 음인 흙을 그리워하고, 음인 보리는 양인 하늘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보리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었다. 마음을 비워 더욱 꼿꼿하다. 보리밥은 평상 위이나 멍석에 퍼질러 앉아 먹어야 더 맛있다. 툇마루나 논밭두렁에서 철퍼덕 앉아 먹어야 꿀맛이다. 보리방구 붕붕 뀌며, 끄윽∼ 트림하며 먹어야 행복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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